서론-‘은총’이란 과연 무엇인가?

 

서론




        ‘은총’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 부자 청년이 있었다. 그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부요하다고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자기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청년은 아직 자신의 젊음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느날 그가 중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그러나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일찍 불러가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


        “기차가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강을 건너고, 들을 지나고, 또는 도시들을 지나서 움직이는 풍경 사이를 빠져나간다. 기차 안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드라마가 전개된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침묵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풍경을 내다보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어떤 사람은 지루해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차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펼치고 있다. 기차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라는 둥, 기차를 잘못 탔다는 둥.”


        보프는 세계 안에 작용하는 해방의 은총은 이러한 기차와 같다고 설명한다. 은총의 기차의 목적지는 하느님이고 가는 길도 역시 하느님이다. 은총은 모든 사람을 싣고 모두에게 즐거운 여행을 할 수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기차처럼 은총은 거부의 표정을 짓지 않는다. 오직 인간들만이 거부하여 여행을 망치는 것이다. 그러나 은총은 그들을 친절하고도 안전하게 싣고 간다는 것이다.


        시인 박노해가 자신의 독방을 “감은암”(感恩庵)이라고 이름을 짓고, ‘살아 있음의 감사와 은총’으로 풀이하고 있다. “살아 있는 하루 하루가 얼마나 고요한 기쁨인지, 얼마나 큰 감사와 은총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나를 좋은 벗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제자 아난다가 말했다. “그말을 듣고 곰곰히 헤아려보니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절반에 해당한다고 봐야겠지요.”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난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착한 벗이 있고 착한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성스러운 길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박노해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그 앞날이 험하다 해도 늘 감사와 은총의 시간일 거라고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26-27, 31-32).


      과연 은총이란 무엇인가?




        ‘은총론’은 가톨릭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삼위의 하느님, 육화, 구원, 원죄 이론과 깊은 관련을 지닌다. 또 ‘은총론’은 교회론과 성사론의 입문적 성격을 지닌다. 은총은 죄로부터의 치유와 하느님의 자녀, 혹은 구원의 한가지 측면인 신화(divinization)를 이해하기 위해 앞서 다루어져야 하는 이론이다. 즉 타락된 본성의 회복과 하느님과 일치된 삶에 도달하기 위한 선물 자체가 은총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락된 본성에도 불구하고 본성적 욕구를 넘어 초월성, 초자연성을 추구한다는 데서 은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물론 한 인간이 끝까지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거부는 한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기만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하느님 앞에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려는 데 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능력의 존재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자만심에 기인한다. 결국 인간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유 역시 선사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자유를 인식하면서도 그 자유가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것임을 잊을 때 우리는 펠라지아니즘에 떨어지게 된다. 펠라지아니즘은 단지 펠라지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이미 펠라지오 이전 고대 스토이즘에서, 그리고 후에는 칸트에 의해 전개되는 세속적 윤리주의도 일종의 펠라지아니즘의 형태이다. 인간은 분명 하느님에게 신세지는 존재이다. 은총은 그것을 표현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은총론’이란 바로 ‘하느님의 사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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