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요한 복음: 생명과 친교
제4복음사가 요한에게서 은총이라는 용어는 세 번 나타난다. 그것도 로고스 찬가에서만 발견된다. 그 가운데 두 번이나 은총은 진리(aletheia)와 연결되고 있다. “말씀이 살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요한 1. 14. 16-17).
은총과 진리라는 이중적 언급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3가지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출애 34, 6 시나이 산의 계약에 나타나는 hesed, we’emet(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의 용어와 동등한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다. 이것은 “사랑-성실성”, 혹은 “현명함-성실성”으로 번역된다. 두 번째 경우는 불트만의 입장이다. 그는 charis를 선물로, aletheia를 헬레니즘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의미의 ‘신적실재’를 의미하고, 사람들에게 계시된 ‘주체적인 진리 그 자체’로 해석한다. 이 두 용어는 중언법, 즉 같은 것을 반복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럴 경우 두 번째 용어는 첫 번째 용어를 설명하고 보충하는 기능을 지닌다. 그러므로 번역하면 ‘신적실재의 선물’이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최근의 입장이다(S.A. Panimolle, I. de Potterie). 이들은 charis를 선물로, charis kai aletheia를 중언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 복음사가에게서 aletheia는 헬레니즘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빌라도 법정에서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복음사가는 바로 빌라도 앞에 선 예수가 진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화하신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베풀어진 ‘계시의 선물’로 번역하게 된다.
요한 1, 16의 의미도 다양한 뉴앙스를 지닌다. 그리스어 anti라는 용어가 그리스 언어의 고유한 용법처럼, 누적적인 의미(은총의 은총,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가 아니라 치환적인 의미라면, 말씀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은총 대신에 다른 어떤 은총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계약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보여진 사랑과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맺어진 계약에서 베풀어진 사랑의 충만함으로 대체되는 것일 것이다. 즉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계시는 육화하신 말씀의 계시의 충만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도들이 오래 생각했던 그 ‘계시의 충만함’은 ‘성부께로 향하는 독생성자의 영광’이다. ‘품’은 아들이 아버지와의 밀접한 관계를 지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분이 지상의 삶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결정적인 ‘은총’을 받게된 것이다. I. de La Potterie는 요한 1, 16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의 신자성에 참여를 허락받았다. 한가지 은총은 다른 은총으로 바뀌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이후 메시아적 충만성과 하느님의 말씀의 성자성의 계시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우리를 그와 동일한 성자성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총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충만함이다. 그것은 육화하신 말씀에게서 드러난다(요한 1, 14). 그리고 그것은 시나이 산의 계약의 선물을 대신해서 선사되는 것이다(요한 1, 16). 또는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의 충만함이신 신적 생명의 선물이며, 또는 마침내 육이 되신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 안에 구성되고 베풀어지는 어떤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으로서의 자신을 계시하고 우리고 하여금 거기에 참여하게 하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상이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요한 복음사가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은총이란 하느님 아버지께서 육화하신 말씀이며,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은총의 기본적 의미를 선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은총은 매우 폭넓은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은총은 선물(dorea, 요한 4, 10)로도 표현되고, 또 동사 didomi(주다. 선사하다. 건네주다)라는 동사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에서는 성령의 선물, 생명의 선물, 생생한 물의 선물, 예수의 활동의 선물, 천상의 빵, 말씀의 선물, 영광의 선물 등이 모두 은총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생명’이라는 요한복음사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용어를 집중적으로 보고자 한다. ‘생명’은 요한 복음에서 아주 자주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복음서 자체의 목적으로도 지시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요한 복음사가는 신앙과 생명이라는 두가지 단어로 구원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4.2. 요한 복음: 생명과 친교
제4복음사가 요한에게서 은총이라는 용어는 세 번 나타난다. 그것도 로고스 찬가에서만 발견된다. 그 가운데 두 번이나 은총은 진리(aletheia)와 연결되고 있다. “말씀이 살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요한 1. 14. 16-17).
은총과 진리라는 이중적 언급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3가지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출애 34, 6 시나이 산의 계약에 나타나는 hesed, we’emet(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의 용어와 동등한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다. 이것은 “사랑-성실성”, 혹은 “현명함-성실성”으로 번역된다. 두 번째 경우는 불트만의 입장이다. 그는 charis를 선물로, aletheia를 헬레니즘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의미의 ‘신적실재’를 의미하고, 사람들에게 계시된 ‘주체적인 진리 그 자체’로 해석한다. 이 두 용어는 중언법, 즉 같은 것을 반복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럴 경우 두 번째 용어는 첫 번째 용어를 설명하고 보충하는 기능을 지닌다. 그러므로 번역하면 ‘신적실재의 선물’이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최근의 입장이다(S.A. Panimolle, I. de Potterie). 이들은 charis를 선물로, charis kai aletheia를 중언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 복음사가에게서 aletheia는 헬레니즘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계시를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빌라도 법정에서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복음사가는 바로 빌라도 앞에 선 예수가 진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화하신 말씀으로부터 우리에게 베풀어진 ‘계시의 선물’로 번역하게 된다.
요한 1, 16의 의미도 다양한 뉴앙스를 지닌다. 그리스어 anti라는 용어가 그리스 언어의 고유한 용법처럼, 누적적인 의미(은총의 은총,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가 아니라 치환적인 의미라면, 말씀의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은총 대신에 다른 어떤 은총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계약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보여진 사랑과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맺어진 계약에서 베풀어진 사랑의 충만함으로 대체되는 것일 것이다. 즉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계시는 육화하신 말씀의 계시의 충만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도들이 오래 생각했던 그 ‘계시의 충만함’은 ‘성부께로 향하는 독생성자의 영광’이다. ‘품’은 아들이 아버지와의 밀접한 관계를 지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분이 지상의 삶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결정적인 ‘은총’을 받게된 것이다. I. de La Potterie는 요한 1, 16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의 신자성에 참여를 허락받았다. 한가지 은총은 다른 은총으로 바뀌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이후 메시아적 충만성과 하느님의 말씀의 성자성의 계시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우리를 그와 동일한 성자성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총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충만함이다. 그것은 육화하신 말씀에게서 드러난다(요한 1, 14). 그리고 그것은 시나이 산의 계약의 선물을 대신해서 선사되는 것이다(요한 1, 16). 또는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의 충만함이신 신적 생명의 선물이며, 또는 마침내 육이 되신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 안에 구성되고 베풀어지는 어떤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으로서의 자신을 계시하고 우리고 하여금 거기에 참여하게 하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상이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요한 복음사가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은총이란 하느님 아버지께서 육화하신 말씀이며,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은총의 기본적 의미를 선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은총은 매우 폭넓은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은총은 선물(dorea, 요한 4, 10)로도 표현되고, 또 동사 didomi(주다. 선사하다. 건네주다)라는 동사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에서는 성령의 선물, 생명의 선물, 생생한 물의 선물, 예수의 활동의 선물, 천상의 빵, 말씀의 선물, 영광의 선물 등이 모두 은총에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생명’이라는 요한복음사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용어를 집중적으로 보고자 한다. ‘생명’은 요한 복음에서 아주 자주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복음서 자체의 목적으로도 지시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요한 복음사가는 신앙과 생명이라는 두가지 단어로 구원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