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갈라디아서: 신앙과 그리스도교적 자유
그러나 사람의 심장의 뿌리는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남아 있다. 복음의 메시지, 즉 바울로의 메시지는 많은 장애들을 만난다. 바울로는 이미 그의 전도 여행 가운데 예수 자신이 만났던 율법주의와 보수주의들과 같은 적대자들과 충돌하게된다. 유다인들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코니아, 리스트라, 그리고 그 밖의 소 아시아 지역에서 테살로니카나 코린토에서처럼 그러한 장애들은 바울로의 전도 사업을 훼방하였다(사도 13, 50; 14, 2. 18; 17, 5; 18, 12). 그들은 에페소에서는 바울로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인데 비해서 자기들의 무능력에 대하여 분노하였고, 아르테미스 여신전의 멸시를 이유로들어 군중들을 부추켜서 바울로를 죽이려고 하였다(사도 19, 13. 33; 1코린 15, 32; 2 코린 1,8).
그러나 이러한 모든 소동은 단지 그 전조였을 뿐이다. 실제적 투쟁은 교회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유다적 그리스도교 일파에서는 구원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오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바리사이파적 율법 준수에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그러한 대치적 상황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의화에 대한 이론을 분명하게 보여줄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누가 여러분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갈라 3, 1). 이러한 서두는 신앙을 통한 의화와 그리스도교 자유에 대한 바울로 사도의 탁월한 주제를 안내해주고 있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 시대에 반대자들과의 논쟁에 바울로의 이러한 이론을 이용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양쪽 모두 논쟁점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바울로가 이러한 이론을 내세우게 된 배경은 신생 교회를 위한 구원의 의미였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세상을 장악하였다면 할례는 멈추어야 했고 이방인들에게 요구되었던 유다적 율법준수도 멈추어야 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스승의 가르침과 성령의 영감을 받아 구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보편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물론 그는 여전히 그의 종족과 영적 상속에 사로잡혀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히브리인으로 태어나고 한 때 바리사이파에 속했던(필립 3, 5; 2 코린 11, 22) 바울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는 서서히 복음에 의해 요구되는 이러한 태도를 실현해 나갔다. 바울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가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물러났기 때문입니다”(갈라 2, 11). 두 사도간의 이러한 차이는 후에 예로니모와 아우구스티노 사이에서 재현된다. 그것은 단지 해석학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이룬에 대한 이해문제였다.
바울로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온다. 결코 율법과 그 업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갈라 2, 16-21). 율법은 단지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가정교사에 불과하다(갈라 3, 24: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않는 한 그는 노예이다. 그러나 때가 오면, 율법 아래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 자유는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갈라 4, 5.6.31).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님을 깨닫게 하고 하느님께 “아빠, 아버지”(갈라 4, 6)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거기에는 더 이상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 노예거나 자유인의 구별이 없다. 단지 처음부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있을 뿐이다(갈라 3, 26. 28). 오직 한분 동일한 아드님이 계시다. 그분은 세례를 통하여 은총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모두를 위하신 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룹니다”(갈라 3, 28). 이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결코 퇴색될 수 없는 대담한 형식이다. 우리 각자는 사도 바울로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라 2, 20).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자유는 위험으로 가득찬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합법적 준수를 다양하게 실천하는 것보다 자기 거부를 적게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한 인간이 이러한 율법 준수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래서 그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다시금 노예살이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상이한 부담에 의해 충돌되는 것이다. “육정의 노예살이란 음행, 추행, 방탕, 분노. 시기, 이기심이고.(갈라 5, 19-21) 그것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이끈다(갈라 6, 7-8).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자유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세례 때 주어진 신앙의 결실이다(갈라 3, 23-28). 그리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끊없는 노력의 결과이다(5, 24; 6, 14). 사랑을 통하여, 율법 전체의 요약인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통하여, 평화. 성실성, 인내등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신다. 마지막 심판 즉 추수때 그 결실을 얻게하신다(갈라 6, 8).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화하신 내용의 메아리임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요한 8, 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