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이해의 역사적 개관-스콜라학파 이전의 신학

 

5.6. 스콜라 학파


5.6.1. 창조되지 않은 은총과 창조된 은총의 구별




        스콜라 학파:  신학에 형이상학이 도입되면서 은총에 관한 이해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하였다. “행위는 존재로부터 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라서 은총이란 덕을 낳는 보다 앞선 하나의 원리, 행위를 낳는 정신의 새로운 존재론적 성질로 파악하였다. 은총이 새로운 실체라면 그 자체가 사람과는 다른 하나의 주체가 될 것이며, 사람이라는 주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은총은 사람에게 존재론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인간 안에 덕을 낳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 안에서 창조된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며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이전의 원리로서 창조되지 않은 은총을 전제하게 하였다.


        은총이란 본래 관계 개념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것이 아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행동 자체, 그분의 자유롭고 무상적인 자비, 선, 사랑이다. 이것을 스콜라 신학은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라고 명칭하였다. 인간 상호 간의 사랑이 ‘나’와 ‘너’ 사이에 공동으로 머물고,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의 외적으로 머물지 않으며 그의 삶을 성취하는데 영향을 주고, 선사하고, 대응적으로 사랑하게 하는 점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분명 은총은 인간 속에서 인간에게서 체험될 수 있는 실재요, 창조적으로 작용하는 무엇이다. 즉 하느님이 사랑하면, 그분이 인간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며, 그는 더 이상 죄인으로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동반자가 된다. 이와같이 창조되지 않은 은총은 인간을 내적으로 변형시킨다. 이러한 내적 변형을 스콜라 신학은 ‘창조된 은총’이라고 구분하였다.


        이점을 중세기의 베드로 롬바르두스가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하느님의 은총,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 하느님의 성령 자신으로만 머물면, 인간의 자유를 대치할 뿐이고,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 속에서 당신 자신만을 사랑하는, 하느님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한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창조되지 않은 은총은 창조된 은총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 인간의 삶 속에 실재하게 되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스콜라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태’라는 범주 개념을 빌린다.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상태를 형성한다. 마치 운동인의 상태가 운동 행동을 자신으로부터 분출하는 것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선사된 ‘창조된 은총’은 모든 인간 행동의 뿌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운동가의 상태는 인간의 실적이지만 은총은 인간의 실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소유됨을 의미하며 하느님의 성령의 순수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즉 아우구스티노의 내면화한 은총 이해에 의지하여 창조된 은총의 이 상태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즉 가지시적이요 존재적인,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주입된 인간 주체성, 이성과 원의의 변화로 이해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창조된 은총의 원형은 인간성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 피조물 차원에서 구체적이고 표징적으로 작용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의 인간적 실재에로 매개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고 그가 세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매개되고. 이 하느님의 사랑이 피조물의 매개를 통하여, 즉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우정을 통하여, 교육과 사회화를 통하여, 인격적인 해후와 사회 구조를 통하여 인간에 이르는 가운데 인간적 자유의 면모가 깊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들은 서로를 위하여 구원의 의미있는 중재자가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교리에서 ‘창조된 은총’은 ‘gratia infusa(주입된 은총)’, ‘gratia sanctificans(성화은총)’이라고 불리웠다. 이 교리는 자칫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한 복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위협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과연 성화은총을 소유하고 있는지 묻게되는 불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때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 의지를 통하여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오해려 악에 대한 공포, 멸망에 대한 공포 때문이 된다. 창조된 은총이라는 교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려 하기 이전에 이미 그분이 지극한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예’를 수락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복음을 신학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theology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