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은총 논쟁
1) 배경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은총론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였다. 신학은 합리주의와 도덕주의의 조류에 휩싸였다. 은총의 문제는 근세 사상의 특징적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하느님이 당신의 은총 속에서 무엇을 행하는지 묻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인간의 능력이 은총으로 어떻게 지원되고 촉진되는가를 묻는다. 즉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 관점이 아니라 창조된 은총이 그 관점이 되고 있다. 조력은총이 어느 정도로 필요한가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역사 속에서 가톨릭 내의 두 학파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도민고 학파(바네스)와 예수회 학파(몰리나)의 논쟁이다.
2) 아우구스티노의 고풍주의
바유스(Michael Baius)를 비롯한 루벵신학자들은 원죄 이전의 인간만이 은총에 대해 자유로웠다고 강조한다. 즉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에로 복귀한 셈이다. 인간은 마치 당나귀와 같다. 악마가 타거나 하느님이 타면서 그 노예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악한 노예신분에서 선량한 노예신분에로의 전환은 인간의 자유의 협력없이 오로지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얀세니우스(Cornelius Jansenius 1585-1638), 꿰스넬(Pasquier Quesnel)에게서도 나타난다. 극단적 아우구스티노주의를 반대한 이 논쟁을 ‘구두점을 둘러싼 논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바유스의 명제를 단죄한 교황청 문헌이 구두점이 어디에 찍히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교황청에 문의하였을 때 교황청은 구두점이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교서 일부를 보냈다. 그러므로 이 교서가 의미하는 바가 오늘날까지 해명되고 있지 않다.
Quas quidem sententias … quamquam nonnullae aliquo pacato sustineri possent(,)… proprio verborum sensu ab assertoribus intento haereticas, erroneas, suspectas… dammnamus et abolemus
1) 우리는 이 견해들을 이단적이며 오류적이고 수상하다고 단죄한다…. 그리고 이들을 단죄하고 배격하는 바이다. 이 견해들 중에 어떤 것은 저자가 뜻하는 바와 같이 본래의 말의 의미에 따라서 어떻게 묵과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2) 우리는 이 견해들을 이단적이며 오류적이고 수상하다고 단죄하는 바이다… 그리고 저자가 뜻하는 바와같이 본연의 말의 의미에 따라서 이들을 배격하는 바이다. 이 견해들 중의 몇 견해는 어떻게 묵과될 손 치더라도…
구두점 사용 여부에 따라서 그 견해들이 저자들의 의미로서 논의될수도 있거나, 저자들의 의미로서 이단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떻든 이들이 단죄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주장에는 인간의 자유가 과소평가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셈이다. 가톨릭의 신앙을 위한 은총에 관한 입장은 다음의 요소를 필수적으로 지닌다. 1)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작용하여 인간이 긍정이나 부정의 태도를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총은 여전히 효력을 지녀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 자유의 주인이시기도 한 까닭이다.
3) 내용과 경위
이 딜렘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은총을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충족은총(gratia sufficiens)과 효능은총(gratia efficax)이다. 충족은총이란 그 수용 여부가 인간의 자유에 좌우된다. 인간은 이 은총에 대하여 거부하거나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효능은총은 인간이 거역할 수 없이 하느님께서 그것을 수용하도록 관철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민고의 바네스(Domingo Banez 1528-1604)와 예수회의 몰리나(Luis de Molina 1535-1600)가 대결하였다.
예수회의 몰리나는 인간의 자유에 가능한 공간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제공되는 은총은 충족은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그 은총이 효능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도민고회의 바네스는 반대로 충족은총이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상대개념이며 선험적으로 효과를 발하는 효능은총에 중점을 둔다. 하느님의 주도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예수회원들은 도민고회원들에게서 극단적주의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를 보고, 도민고회원들은 예수회원들에게서 펠라지아니즘을 본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연합될 수 있는가? 하느님이냐? 인간이냐? 이 논쟁은 오랜 세기 계속되었고, 아무것도 결정될 수 없다는 결론만이 잠정적으로 내려졌을 뿐이다. 성서나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두가지를 모두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전통적인 은총론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은총론은 인간이 언제나, 어디서나 자기 존재의 충만, 즉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인간의 잘못과 과실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며 당신 자신을 수교하심으로써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고백한다.
2) 하느님의 주도적인 은총 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순전히 수동적이게만 하지 않고, 인간이 자유를 가지고 응답하게 하신다.
3) 하느님의 은총에 관해서 마치 인간이 정신과 육신을 나누듯이, 개인성과 사회성을 구별하듯이 구별 가능하다는 추상적 사유를 극도로 밀고 나가 하느님이냐? 인간이냐?는 양자택일로 치달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틀을 벗어나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