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문: 은총의 구분
1항: 은총은 인간을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하는 성화은총과 예컨대 기적들의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는 은총’으로 나뉜다.
2항: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으로부터 움직여지지 않고서는 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이 ‘자력은총(gratia operans)’이다. 그리고 이미 선으로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이 의지의 기능들을 지탱해 주지 않는다면 기능들을 명령해서 그 선을 이룰 수 없다. 이것이 ‘조력은총(gratia coopernas)’이다.
3항: 은총은 결과에 따라 1) 치유하고, 2) 작용하고, 3) 협력하고, 4) 인내심을 주고, 5) 영광스럽게 만든다. 이 순서에서 뒤에 오는 결과는 언제나 선행하는 은총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면, 영혼이 올바로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영혼이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은총은 선행하는 것과 후속하는 것으로 나뉜다.
4항: 거저로 허락된 은총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하느님의 공동 협력자가 되게 한다. 이 과제를 위해서는 신적인 것들에 대해 내밀하게 깊이 아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입증하고 그것을 제시할 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거저 주어지는 은총들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서 지혜의 정신, 앎의 정신, 믿음의 정신, 치유의 은총, 예언의 은총, 양심 식별의 은총, 언어의 선물, 연설의 선물 등으로 열거되고 있다.
5항: 우리를 직접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해 주는 성화은총은 거저 주언진 은총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이 후자는 최종 목적을 위해 예비적인 것들에로 향하게 해 줄 뿐이기 때문이다.
112문: 은총의 주인
1항: 은총은 그 수용자로 하여금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은총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다.
2항: 습성적 은총은 그것을 받을 만한 준비가 갖추어진 수용자에게만 부여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의 맞갖은 준비를 요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져야 비로소 인간이 선을 향해 움직일 수 있으므로 인간 측의 준비가 하느님의 은총에 앞서 올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3항: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 행위를 착수할 뿐만 아니라 계속하신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거기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능력껏 활동하는 자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선사하기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은총에 순응하는 자유 의지는 공로가 있다고 자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은총은 언제나 인간의 요구와 자연적 능력을 넘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4항: 은총은 사람에 따라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적게 받을 수도 있다. 이 은총의 다양성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하느님에 의해 안배된 것이다.
5항: 만일 하느님이 계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가 은총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전히 그리고 배타적으로 하느님에게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113문: 은총의 효과
1항: 불신자의 의화는 죄의 용서와 정의 취득을 의미한다.
2항: 죄는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 모욕을 하느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지 않으면 제거되지 않는다. 은총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죄가 지워지지 않는다.
3항: 하느님은 인간이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이끌면서 의화를 선사하신다. 인간은 본성상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이 의화를 향해 나아감은 자유 의지의 행위이다.
4항: 의화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한다. 정신을 하느님께 돌리는 이 첫 번째 행위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의화를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
5항: 자유 의지로 의화되기 위해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신앙 입문자는 자유 의지로 죄를 단절할 것을 결심해야 하고 죄를 미워해야 한다. 죄는 하느님과 상극이 되기 때문이다.
6항: 죄를 미워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죄사함으로 마무리지어진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도 불신자의 의화의 일부이다.
7항: 의화는 일순간에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8항: 죄와 벌을 제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은총이다.
9항: 무로부터의 창조가 죄인의 의화보다 더 위대하지만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죄인의 의화가 창조보다 더 위대하다.
10항. 하느님만이 한 죄인의 의화를 이룰 수 있다. 의화는 기적이다. 그러나 자연적 능력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연적 생명의 능력이 없는 시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적 수용력을 지니고 있다. 의화는 일상적인 사실이지 비상한 일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사명, 천사들의 은총 혹은 첫 인간의 은총,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의 예정적 운명, 그리고 성사들의 효과등을 다루는데서 은총을 언급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에 관한 생각은 초기 작품인 Quaestiones disputatae에서도 볼수 있다. 여기에서는 예정, 신앙, 자유 의지, 은총과 의화, 초자연적 덕행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분석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떻든 우리는 여기서 모든 자료를 상세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몇가지 주요 자료의 근거가 되는 점들만을 보고자 한다. 독자들은 그 문헌 자체에서 자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퀴나스의 은총 이론이 무엇보다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의 최후의 종말’이라는 가르침에서 잘 이해될 수 있기에 하느님께 가는 인간의 그 길에 대해서 토마스 성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인간의 최종적 결말
모든 존재는 그 본성상 그 종말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은 본성을 따라서 받게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제 인간은 이러한 규칙에 예외가 발생한다. 창조된 피조물이 지니게 된 이 종말은 절대적으로 그의 본성의 정비례의 관계를 벗어난다. 천사처럼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어떤 다른 존재와 같지 않게 영적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서 ‘capable of God’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안에‘ 존재하게 된다고 말하게되는 탁월함 때문이다. 다른 창조물들은 단지 창조주의 자취일 뿐임에 비해서.
그러나 이러한 탁월함이 인간의 비참함의 원천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덜 고상한 종말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은 존재로서 그 자신의 힘을 통하여 그러한 종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만이 홀로 인간을 완전하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하느님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신적인 도움을 필요로한다. 하느님에 의해서 자유롭게 제공되는 도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인간 편에서도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인간은 그 도움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빛을 주시는 태양이며, 영혼은 그 빛에 자신을 개방하는 눈이다. 그리고 죄는 하느님과 그 영혼 사이를 가로막는 불투명한 막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의존성은 불완전하지 않는가? 모든 다른 동물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가 물질적인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두가지 귀중한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의 손과 이성이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내적 덕행을 주시지 않는가? 그 덕행들은 그 종말을 향하여 그를 이겨낼 수 없는 경향으로 이끄는 그러한 덕들을 주시지 않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한다. 복됨, 지복직관은 하느님 자신을 제외한 어떤 존재에게도 자연적일 수 없다. 그의 욕구 안에는 인간이 그분의 복됨을 함께 나누고자 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의 선물을 주셨다. 그러한 것은 인간에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덧붙인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고상한 종말을 위하여 정향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존재로부터 그것을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비참한 종말을 혼자서 추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진정한 친구이시다. 그분은 그의 은총을 우리의 처분에 내놓으셨다. 그리고 한가지만을 요구하신다. 그것을 무상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거부하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말해서, 자연적 질서 안에 남기를 원한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을 지복적 직관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자신을 단죄하고 있다.
이러한 종합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는 요소들을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제까지는 단지 아우구스티니안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 균형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이루어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최종적 종말의 초월성을 아우구스티노보다도 더욱 더 강조하고 있다. 아리스토 철학은 아우구스티노에게서는 결여되어 있었던 자연에 관한 견고한 개념을 가져다 주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최종적 종말에 관하여 어떤 점도 토마스에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불사불멸성에 아주 적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명상에 기초한 지상적 행복을 영혼의 특권으로 허락하는 것 이상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아직 순수-자연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토마스 성인은 여기서 신학적 전통을 철학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어떻게 지성적 창조물의 초자연적 목적성이 자연적 질서 안에 그 진실한 항구성을 선사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 종말과 초자연적 종말 사이의 구별에 적용된다. 토마스는 끊임없이 이 구별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만일 우리가 그의 생각을 오해하는 것을 피하려면 그의 고유한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후기 토미즘 전통은 아퀴나스가 구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구별하고 있다.
109항은 은총의 입문적 성격을 띤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노는 본성과 초자연 사이의 구별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인간이 최후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즉 하느님의 지복에 참여하기 위해서 실존의 차원이 상승되어야 한다. 즉 초월적인 차원에 이르러야 한다. 여기서 가능태로부터 현실태에로의 움직임을 위하여 운동인의 동인을 적용한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제1운동인이신 하느님에 의하지 않고서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움직이지 못한다. 즉 초자연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의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둘째, 원조의 타락으로 부패한 인간 본성은 자연적인 능력의 도움도 필요로 한다. 셋째, 인간이 피조물인 만큼 자연적 조건에 있는 인간은 선의 완수를 위하여 하느님의 도움이 동인을 필요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