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은총과 성화은총-성화은총의 본질(은총과 본성의 관계(하))

 

인간은 인격체로서 본질적으로 사랑에 의존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충만을 그가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때만 발견한다. 인간이 이렇게 전적으로 사랑에 의존하지만, 그는 사랑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루박은 자신을 인격적 범주로 생각할 때 은총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는 반대자들의 반론이 무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 차원에서는 필요성과 같은 범주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주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반대자들은 루박이 은총에 창조가 지녔던 무상성을 부여했다고 비난햇다. 사실 창조 자체가 인간에게 비채무적이다. 이제 창조의 무상성에 또 다른 새로운 은총의 무상성을 받아들여야 하는가가 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결국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쟁점화되었다. 50년대의 이 신학적 토의를 진전시킨 사람은 칼 라너이다. 라너는 루박과 함께 스콜라 이론 체계의 이중질서를 배격한다. 루박과의 차이점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은총의 완전한 비채무성은 루박에게서처럼 하느님과의 자연적 일치가 곧 은총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면,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동경은 확고히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은총의 비채무성이 창조 사실 하나로 보존된다는 루박의 반론은 충분하지 못한데 이는 은총의 비채무성이 이미 소여된 구체적인 생활조건 속에서 생활하는 창조의 본성에서부터 드러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라너는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실상의 창조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 속에서의 한 내적 소인이고, 인간은 이 하느님의 인격적 자기 전달의 수취 대상자이다. 이렇게 이해되기 때문에 이 가능성은 인간 현 존재의 중심이며 근간이다. 그래서 자기를 전달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 가능성은 인간의 중심적이고 지속적인 호칭이면서 순수 본성의 추상개념을 도입한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사랑의 선물이고 영원한 기적이고 여기 은총의 비채무성이 나타난다. 실제로 인간이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유로운 선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속하는 인간의 실존 역시 비채무적인 것으로, 즉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라너에게 본성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기전달 없이 지속하는 실존으로 생각되어야 할 때 인간에게 남은 것을 뜻하는 잔여 개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의 순수 본성이 어떤가를 판정할 수 없는데 이는 인간의 사실상의 현존재가 항상 어디서나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않에 놓여지고,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순수한 본성은 존재하지 않고, 초자연적으로 각인된 본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라너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한을 향해 개방되어 있음이 인간 정신의 본질에 속한다면, 여기서 다시 잔여개념을 산출해 낸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사실상 초월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존속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그저 소여되기도 하고, 과제로서 주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에게 자신의 긍극성을 획득하려는 자유가 있다.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인간은 무한자, 하느님께 개방되어 있다. 인간은 본성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 다의적이어서 오늘날 이 인간 본성의 다위성은 두 개의 양자택일로 나아간다. 즉 하느님 없는 인도주의와 통합적인 인도주의이다. 무신론적 인도주의는 하느님과 양자택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 자유의 한계라고 보며, 자유를 제한하는 하느님을 배척한다. 이에 대해 통합적인 인도주의는 하느님이 인간을 제한하지 않고, 당신의 사랑 속에서 당신의 은총 속에서 인간을 충만으로 해방시킨다고 간주한다.  이문제는 순전히 추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이끌어나갈 수는 없다.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을 그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본래의 자신에게로 해방시키는 가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과제이다. 이 배경 위에서 본성과 은총의 관계를 추상적인 보편적 본성과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본성과의 관계속에서 규정할 수 있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하느님을 거슬러서 결단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본성이 있을 뿐이다. 이 결정은 자유의 매개를 통해서 일어난다. 순수한 본성의 상태는 없다. 역사적으로 원죄 이전의 본성을 뜻하는 통합된 본성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낙원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처음 인간과 게획한 상태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잇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간들은 이 제의를 거부해 타락한 본성의 상태가 왔다. 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를 다시 찾은 회복된 본성의 상태가 죄의 고통을 당하는 속에서 이루어진 빠스카 사건으로 주어졌다. 타락된 본성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인간의 제2의 본성인 죄로부터 탈출에 있다. 그리고 이 탈출은 인간의 회개를 뜻한다. 이 회개를 통하여 인간은 회복된 본성 상태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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