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선교학(Missiology)-선교역사(지리상 발견과 범세계적 선교)

 

4. 지리상 발견과 범세계적 선교




그리스도교가 유태 세계에서 그리스. 로마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고, 새로운 문화인 게르만적 중세의 세계에 정착하여 동화(同化)되기까지 수세기가 소요되었다. 중세의 전기와 중기에 강력한 포교활동으로 전 유럽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지중해 인접의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민족들을 크다란 하나의 문화권으로 결속시켰으나, 7C부터 시작된 회교가 빗장처럼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사이를 가로막았다. 얼마 안 되는 교회만이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회교 지역에서 지탱될 수 있었다. 비잔틴은 어려운 가운데 유지되었으나, 그리스도교는 유럽에 국한되었다. 마침내 1054년 대이교로 말미암아 교회는 일층 서구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장애물을 무력으로 분쇄하려는 십자군의 기도는 결국에 가서 실패하였다. 터키 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1453)은 서구의 판도를 더욱 축소시켰고,16C의 종교개혁은 최후의 타격이었다. 북부지방을 상실한 가톨릭은 동남부 유럽에 국한되었다.


13-14C에 이탈리아의 두 도시국가인 Venezia와 Genoa가 장악하고 있던 유럽의 재해권이 15C중엽부터 Portugal과 Espana에 넘어왔다. 15C의 유럽은 이슬람의 위협을 격퇴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세력에 둘러싸여 육로에 의한 교역이 불가능하였다. 정치적, 상업적(황금), 문화적 혹은 선교적(복음) 목적으로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대서양으로 향했다. 조선술 및 항해술의 발전과 나침반의 사용으로 이슬람과 흑인들을 측면에 두고서 남쪽으로 향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브라질로,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의 중남부로,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로 향하였다.1)




1.국가 후원의 선교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의 통치자들은 세계를 그리스도교화하고자 언제나 선교사들을 동승시켰다. 교회도 16C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약화된 교세를 만회하기 위해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중세기에 창설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의 수도회가 앞장섰다. 교황 니꼴라오 5세(Nicolas, 1447-1455)는 칙서를 통해서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권과 점유권을 승인하여 노예 상인들이 선교사들을 따라오게 되었고, 교황 갈리스도 3세(Calixtus, 1455-1458)는 ‘그리스도회’(The Order of Christ)를 설립하였고, 왕은 위대한 군주(Grand Master, 1461)가 되어 식민지에 교회를 건설하는 동시에 선교사들의 신변안전과 생계유지를 보장할 의무와 교회 감독권을 부여받았다. 이것을 ‘국가의 교회선교 후원’(보호권: A Right of Patronage: Padroado)이라 한다.2) 콜롬부스가 스페인 왕가의 지원으로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고 귀환했을 때(1493), 교황 알렉산델 6세(Alexander, 1492-1503)는 스페인 왕에게도 포르투갈 왕이 가진 특권과 선교의 의무를 부여하였다. 1년후 두 세력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서양의 Azores를 중심으로 지도상에 가상의 선을 긋고 포르투갈은 동부지역(인도, 중국, 일본, 아프리카), 스페인은 서부지역(아메리카 전체)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뒤늦게 신대륙 진출에 나선 다른 국가들과의 분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3)




2.종교 제국주의 선교방식




인제 범세계적인 선교시대가 개막되었으나, 국가의 선교 후원제도는 교회가 의도한 대로 선교의 수단이 되기보다는 군사적 정복의 정당화와 식민지 지배의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선교사업은 점령군의 역할로 간주되고 선교사는 식민정치의 협조자로 토착민들에게 인식되었고,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도 ‘잔인하고 불의하고 무자비한 존재’로 인식하였다4). 선교의 방법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비그리스도교인은 어둠의 자녀이고 비그리스도교적인 생활과 제도에는 선교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정복과 동시에 이교를 근절시키고(백지상태에로의 파괴, tabula rasa), 신앙을 강제로 이식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이것은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과 문화적 우월의식, 그리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가르침에서 비릇된 것이다.5) 도미니코회 라스 카사스(Bartholomew de las Casas, 1474-1566)6)는 원주민들의 강제노동과 착취 평화적인 포교를 위해서 끊임없이 항의하였고, 성 베드로 클라베(1654)는 흑인과 노예들을 위하여 저항하였다. 식민지 지배가 확고하고 현지의 토착민들이 고부고분하고 저항을 보이지 않았던 중남미와 남미에서는 어느 정도 포교가 가능했으나, 인도, 중국, 일본 등 오랜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그 기반을 확고히 할 수가 없었다.




3.새로운 선교방식-적응(適應, accomodation)주의




식민주의와 유럽식에 의한 선교정책과 방법은 예수회의 등장(1535)으로 도전을 받았다. 이 수도회의 목적은 종교개혁에서 제기된 문제에 직면하여 교회쇄신을 이룩하고, 새로 발견된 지역에서 선교사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동양 즉 인도, 일본, 중국은 예수회 선교활동의 주요무대였다. 프란치스꼬 사베리오(Francesco de Xavier, 1506-1522)가 일본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명나라에서, 로베르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1656)가 인도에서 새로운 선교방법을 시행하였다.


이들은 지배자나 백인의 우월로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으로서 선교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과 의식주를 같이 하였다. 주민들이 교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를 배워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그들은 문화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분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에 위배되는 것은 수용하지 않더라도 문화적인 것은 되도록 관용하는 선교방식을 선택했다7)


교회당국은 국가의 교회후원 체제에서 독립하여 선교업무를 직접 중앙에서 관장하기 위하여 교황 Gregorius 15세(1621-1623)는 포교성성(Propaganda fide, 1622)을 설립하여 선교지침을 수립하였다. 제국주의적 선교방법에서 탈피하기 위해 주교좌를 많이 창설하여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하였고, 수도회의 선교사들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재속사제도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 재속사제 단체인 ‘빠리 외방 전교회(1658)가 창설되었다. 우르바노 신학교가 설립되어(1627) 방인사제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포교성성의 선교지침은 주교좌 증설에 있어서 국가의 교회후원 제도와 마찰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편법으로 ’교황대리감목‘(1658)이 신설되었고, 지정된 지역에서 그 지방 주교로서가 아니라 명예주교와 교황의 대리자로서 주교의 완전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기존의 주교들은 포교성성의 선교사들을 배척하였고, 이러한 사태는 1953년 포르투갈과 교황청이 합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4.적응논쟁




인도의 노빌리는 주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적응하기 시작하였고,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이교적이 아닌 한에서 인도의 종교적 관습을 허락하였다. 인도의 고행자처럼 생활하며 그들의 종교언어인 산스크리트를 배웠고, 설교를 그들의 성전과 연결시켰으며 관용을 배풀었다. 17C말에 이르러 적응주의에 대한 논쟁이 일고 오랜 대결 끝에 베네딕도 14세(1742)에 의해서 단죄되었다.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는 적응주의를 채용하여 1585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천문학자용 수학자로서 1601년이래 북경의 궁궐에서 생활하였고, 황제의 친구요 조언자로서 공공연하게 포교하였으며(사망 시 지도층 인사 2천 여명) 택지를 하사 받아 남천주당을 건립하였고, 유교사상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해설하는 漢譯西學書의 하나인 天主實義(1601)를 저술하였다. 아담 샬(Adam Schall, 1592-1666)은 ‘흠천감’(欽天監)이 되었다(1645). 그는 북경에 택지를 하사 받아 동천주당을 세우고(1650) 전국적인 종교 종교자유를 획득하였다(1657). 황제(康熙帝)는 관용령(1692)을 내렸고 신자들도 27만 명이나 되었다.


리치는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서양의 학문(수학, 천문학), 기술(세계지도제작), 문물(자명종, 시계) 등을 이용하여 중국인의 서구에 대한 관심을 끌고, 천주교가 이질적인 종교가 아니라 유교사상과 상통하며 유교의 부족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임을 설득하려는, 적응주의적이고 보유론적(補儒論)인 노력을 하였다. 그는 고심 끝에 배공제조(拜孔祭祖)를 민속으로 규정하고 허용하였다.8)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리치와 예수회원들을 로마에 고발함으로써(1635),9) 중국 제사문제는 일백여년간 격렬한 신학적 쟁점이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적응주의를 잠정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는 중국 선교의 성공이 동양 유교문화권 전체에 대한 선교활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됨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기에10) 교황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1651). 교황 알렉산델 7세는 예수회의 견해를 수용하는 훈령을 반포하였고, 포교성성은(1659) 중국 선교사들에게 신앙을 전할 것이지 유럽의 관습이나 풍속을 이식하지 말며, 선교지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비록 비난받을 만한 악한 관습을 변경시킴에 있어서도 자제와 침묵으로써 하되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에 하라고 지시하였다.11) 한편 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가 40일간의 회의 끝에 중국의 실정을 보아 적응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대 의견일치를 보았고 제사 논쟁은 끝난 듯 하였다(1668).


그러나 뒤에 진출한 파리외방선교회가(1684)가 배공제조의 의식을 금지시키고 신자 가정에서도 조상의 위폐를 치우도록 명령하였고, 예수회는 康熙帝 자신의 유권해석을 교황에게 보냈으나(1700), 역효과를 초래하였고, 오랜 검토와 격론(금지1645, 허용1656, 금지1704,1715) 끝에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근본적인 금지령을 선포하였다(1742). 당시 황제는 교황사절에게 이렇게 비난하였다.


“당신들은 당신네 종교를 파괴하였으며, 많은 서양인들을 傷害하였다. 비단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서양인의 업적이 당신들로 인하여 치명적 상처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천주의 뜻은 아닐 것이니, 천주는 항상 인간을 선행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서양인으로부터 魔鬼가 인간을 不善으로 유인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인제 교황으로부터 온 告示를 보건대 반드시 魔鬼의 짓임이 틀림없도다.”12)


이 근시안적인 승리는 동양의 포교에 있어서 치명적이었고, 장기간의 박해가 뒤따랐으며, “국가주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사상에 지배된 유럽중심주의적 태도”, “19-20초를 통하여 꾸준히 추구해 왔던 제국주의적 포교전략의 일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세기에 선교사들이 다시 중국에 입국할 수 있었고, 비오 11세는 일본의 神社參拜를 허용하였고(1936), 비오 12세(1940)는 중국의례의 금지령을 철회하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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