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론 강의-조직신학적 고찰

 

4. 조직신학적 고찰


4.1.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의 주요 교의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은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즉 인간이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 시간과 장소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확신에 근거를 둔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구체적인 인물 안에서 더 이상 능가할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약성서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즉 예수의 삶과 운명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무한대로 사랑하는 분으로, 죄인인 인간의 온갖 적대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신약성서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이야기들과 표상들은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증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숙고는 일차적으로 나자렛 예수가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마태오는 마리아를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메시아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여인,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서 성령을 통해서 잉태한 동정녀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미 신약성서 안에서 마리아에 대한 시각이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루가와 요한 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는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계약의 백성을 표현하고 대표한다. 즉 메시아를 낳은 유다 여인 미리암(Mirjam)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동시에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예시(豫示)한다. 앞으로 하느님 백성에 속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인은 예수와의 육신적인 친족관계가 아니라 ―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인격적인 신앙의 결단에 있다. 또한 성서는 마리아가 인간적 측면에서도 대표적, 모범적 의미를 지닌다고 묘사한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인간들에게 모범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신앙인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고대교회 교부들 역시 성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의 맥락에서 고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431년에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는 구세주를 낳으신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하였다. 또한 성서에 증언된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동정잉태”라는 주제는 점차로 “평생동정”으로 확대되었는데, 교회 공식적으로는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최초로 마리아를 평생 동정녀라고 언급하였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동정녀라는 가르침은 초기 500년 동안에 개최된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적 결정과 함께 동, 서방교회의 공통의 신앙고백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된 성모의 원죄없는 잉태와 몽소승천에 대해서는 중세 당시에도 신학자들간에 많은 논쟁이 있었고, 교도권적 차원에서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비로소 1854년에 이르러서 교황 비오 9세에 의해서 성모무염시태가, 1950년 비오 12세에 의해서 성모몽소승천이 교의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이 두 교리를 성서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가톨릭 교회의 주요 마리아 교리를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




4.2.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스도교 초기의 여러 신앙고백문은 성서의 증언에 따라서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선포한다. 예를 들어서 사도신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고,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431년에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선포하였다. 공의회 결정문에서 나타나듯이 이 선포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불분명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임마누엘이 참으로 하느님이고, 그래서 거룩한 동정녀가 하느님을 낳으신 분(왜냐하면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육화하신 말씀을 육에 따라 낳으셨기 때문이다)이 아니라고 고백한다면 파문될지어다”(DS 252). 칼체돈 공의회(451)는 이런 에페소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였다 “거룩한 교부들의 의견에 따라서 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한 분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자 하는 바이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 세기 이전에 성부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러나 같은 그분이 인성에 있어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다”(DS 301).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치 마리아가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현존하는 모든 존재의 원초적 근원인 성부(聖父)를 낳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이 칭호는 에페소 공의회의 지향에 따라서 철저히 그리스도론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강생하신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느님이고, 그분의 신적인 본성이 인성과 결합됨으로써 소멸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신적인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낳으셨고”, 그에게 인간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신성과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낳음으로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는데, 이런 마리아의 모성을 단지 생물학적-육신적 측면에서만 주목해서는 안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예”라는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고대교부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였다”(Maria prius concepit mente quam ventre). 마리아는 일차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절대적인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모친이 되셨고 그 다음에 비로소 육체적으로 모친이 된 것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신앙적 순종은 구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을 간파한 것은 고대교회 교부들이었다. 그들은 마리아의 신앙적 순종에서 하와의 불순명으로 야기된 비구원의 상황을 극복하는 길이 열렸다고 보았다. 그래서 리옹의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와의 불순명이 묶어 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주었고,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맺어 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Adv. Haer. III 22,4). 또한 교부들은 마리아가 그녀의 신앙적 태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신앙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전형이며 첫 번째 실현이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이런 유형론적 생각에 기반을 두고서 마리아의 모성을 교회의 모성에 대한 원형으로 간주하였다. 즉 마리아가 믿음과 순명으로 성부의 아들 그리스도를 출산함으로써 어머니가 되셨듯이, 교회도 신앙과 굳은 희망과 진실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을 출산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는 어머니가 된다(교회헌장 63-64항 참조). 이렇게 볼 때 마리아의 모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어야할 것이다. “마리아는 그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사명으로 사람들을 재생시키는 데에 협력하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시었다”(교회헌장 65항).


일부 여성신학자들이나 특정한 영성적 전통에 뿌리를 둔 신학자들은 여인인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의 “여성적 차원”이 직접적으로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그리스도론적 맥락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자식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참조: 민수 11,12; 이사 49,15; 66,13)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성서의 증언이 교회의 복음 선포에 너무 적게 반영되었고, 그래서 이런 차원의 종교적 체험이 마리아 공경과 밀접히 연결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상은 흔히 생각하듯이 가부장적(家父長的)이 아니라 여성적인 특색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굳이 마리아라는 우회로(迂回路)를 거칠 필요가 없다. 마리아는 유다 여인으로서 전적으로 인간이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모성적 얼굴”을 대신하거나 “하느님의 여성적 차원”의 계시도 아니다.


또한 이와 비슷한 동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적) 로고스가 육화되었고 마리아 안에서는 (여성적) 영(Ruach) 혹은 지혜가 위격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주장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시도라고 하겠다. 삼위일체 신학적 전통이 이런 식으로 와해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하느님의 영과 지혜는 마리아에게서 다른 모든 인간의 삶에서 가능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동적이고 실제적으로 작용하였다. 마리아는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과 위격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영이 인간의 형태를 취하기 위해서 예정되거나 선택된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말씀이 육화되기 위해서 인간의 협조를 요청하시는 하느님의 부름에 대해서 인간의 응답을 모범적인 방식으로 실현하였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은총의 도움 속에서 이런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할 수 있는데, 마리아는 이 응답을 인간을 대표해서,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모범적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과 영, 지혜에 대해서 자신을 개방하기를 원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희망의 표징이라고 하겠다.




4.3. 평생 동정


초기의 신앙 표현들(DS 10-64 참조)에서는 성서의 증언에 따라 예수께서 오로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잉태되셨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성령에 의한 동정 잉태의 고백은 점차로 마리아가 예수를 낳는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동정이었다, 즉 평생 동정이었다는 고백으로 확대되었다(3.1.1. 참조). “평생 동정(aeiparthenos)”이라는 표현은 4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되고, 공식적으로는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의 결정문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라테란 시노드(649)에서는 마리아가 출산 전에, 출산 중에, 출산 후에도 동정녀였다고 선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성령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출생은 당신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성화”(교회헌장 57항)하였으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교회헌장 52항)이다.


성모의 평생 동정 교의의 출발점이 된 성령에 의한 동정 잉태는 성서에 명확하게 증언되고 있다. 동정 잉태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론적이며 구원론적 맥락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예수와 그의 구원사건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성부께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자신이 나자렛의 예수 아기와 함께 인류의 역사 안에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셨는데, 이 새로운 시작은 은총에 의한 것으로서 인간 역사 내적 가능성에서 유래되지 않고 하느님의 원천적인 주도권에, 생명을 주며 창조적인 그분의 영에 힘입은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라는 고백은 예수의 파견이 하느님 자신에게 근거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지금까지의 역사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시작, 하느님 스스로 창조적으로 작용한 인간의 실존과 인간의 자기 실현의 새로운 시작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일부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가 과연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1) 동정 잉태의 사실성(史實性)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자연 과학적 입장으로서, 고등 동물에게서 단성 출산(單性 出産)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둘째로 종교학적 입장인데, 고대 세계 신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의 기적적 탄생이라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성서 주석학적 입장이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대해서 바오로 문헌이나 마르코 복음, 요한계 문헌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동정 잉태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학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로 해석하면서 그 이야기가 전하는 신학적 의미만을 받아들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교도권에서는 이런 주장을 거부하고 동정 잉태의 사실성을 고수한다. 예를 들어서 화란 교리서가 동정 잉태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려고 했는데2), 교황의 위탁을 받아 이 교리서의 검열을 맡은 추기경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수정지침을 내렸다. 예수의 동정녀 잉태 교리를 “부정하고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에 반하여 단지 상징적 의미만을 보존하는 ―가령,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사(下賜)하신 순수한 은총을 지적하는 데 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3) 1992년에 발간된 가톨릭교회 교리서도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이 사건의 의미는 “강생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 안에서 바라보는 신앙으로써만 접근할 수 있다”4)고 못박는다.


이렇게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실제적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부부관계를 통하지 않고 얼마든지 한 처녀의 태내(子宮)를 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정 잉태를 아무리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도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이 교의의 핵심은 예수가 현세 인간적 부친을 가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서는 도출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을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셨다는 데에 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서 동정으로 잉태되었다는 교리에서 인간의 성(性)을 불결한 것, 죄스러운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성이 불결하고 죄스럽기 때문에 하느님 아들의 육화는 성적 관계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다고 여긴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좋게 조성하셨고, 남녀의 결합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요셉 랕씡어가 내세운 주장은 계속 정당성을 유지한다. “교회의 신앙에 의하면 예수의 神子性은 예수가 어떠한 인간 아버지도 갖지 않았다는 데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교리는 예수가 정상적으로 인간 婚配에서 출생했다 할지라도 조금도 변치 않을 것이다”.5)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 사건이지 동정 잉태가 아니다.


성령에 의한 동정 잉태와는 달리 출산 중의 동정에 대해서는 성서적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성서는 예수의 출산 자체가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출산 중의 동정이라는 가르침은 성서로 채택되지 않은 제2정전, 예를 들어서 야고보의 원복음서(Protoevangelium) 19장이나 ‘아룬델 수사본’ (Arundel-Handschrift) 유년기 복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6)


초기의 교부들은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위험을 의식하였다. 즉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예수의 참된 인성을 의문에 처하게 할 수 있다고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마리아 자신에게 신학적으로 관심이 집중되면서 이런 염려는 점점 더 뒷전으로 물러났고, 금욕주의적 경향과 맞물려서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출산 중의 동정성이라는 가르침은 마리아가 육체에 손상을 입지 않고 고통없이 예수를 분만하였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출산 중의 동정을 생물학적-신체적 차원으로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참 인간의 탄생인 예수의 탄생을 평가절하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참된 인간존재는 정상적인 인간의 출산을 포함한다. 출산 중의 동정을 계속 신체적인 무구성(無垢性)과 동일시한다면, 과거의 여러 신학자들처럼 처녀막의 손상이 없이도 출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처녀막론’을 계발하는 데에 매달리게 된다.


출산 중의 동정이라는 가르침의 내적인 의미는 교부들이 마리아를 하와와 유형론적으로 대비시킨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고통을 겪으며 출산한 하와는 죄의 세력에 예속된 과거의 인류를 상징하고, 마리아가 고통 없이 출산했다는 표상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된 인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인류가 마리아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신약성서가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리아의 출생 이후의 동정을 고백하는 데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구약성서의 표현에 따라 형제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을 일컫는 말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를 고수한다.7) 실제로 히브리어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명칭으로써 사촌들도 지칭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히브리어나 아라메아어에는 이 친척관계를 나타내는 고유한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8) 하지만 이는엄밀한 의미에서 예수의 형제 자매가 그의 사촌을 지칭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이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예수 출산 이후 마리아와 요셉이 부부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출생 이후의 동정성도 출생 전, 출생 중의 동정성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육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리아가 동정 잉태를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녀의 신앙적 순종에 있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려는 헌신적 준비 자세,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채워지도록 자신을 내어 두고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 약속에 대한 신앙 안에서 형성하려는 개방성을 보였다. 그리고 루가와 요한 복음은 마리아가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앙적 태도를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충실하게 간직하였다고 말하는데, 여기에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의의 요점이 있다. 마리아를 평생 동정녀로 만드는 요인은 단지 “금욕”, 즉 결혼 생활을 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신앙과 순종의 태도를 변함없이 평생 간직한 데에 있다고 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도 이런 방향의 해석을 시도한다. 즉 공의회는 “믿음과 순명으로 바로 성부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드렸다”(교회헌장 63항)고 설명하면서, 교회도 “주님의 어머니를 본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답게 완전 무결한 신앙과 굳은 희망과 진실한 사랑”(교회헌장 64항)을 지닌다 말한다. 동정성을 단지 육신적으로 협소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총체적이며 인격적인 의미를 해석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석된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한 교의는 그 생성 배경에 있었던 고대의 철저한 금욕주의적 경향, 생물학적-신체적 동정을 그 자체로서 과도하게 숭상하는 잘못된 경향을 극복하는 길을 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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