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총론-구세사의 성사적 구조(구약성서)

 

3. 구세사의 “성사적” 구조




그리스도교 이해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의 뜻이 무엇이지를,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밝혀주신다, 즉 계시하신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항상 역사적인 사건이나 어떤 인물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셨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준다는 의미에서 성사적이라고 하겠다. 구세사는 이렇게 성사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성사적 구조”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건, 인물 등을 통해서 가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 인물들은 단순히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함의 표징이 된다. 즉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가까이 오셔서 인간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면 이제 신‧구약성서를 통해서 드러난 구세사의 성사적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리스도교의 이런 성사적 이해는 신적인 것은 시간에 관계 없이 알아볼 수 있기에 역사적 사건이란 별 의미가 없다고 보는 희랍 신화의 사고와는 대치된다. 또 신과의 교통은 오로지 개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기에 육신적인 만남이란 별 소용이 없다고 보는 내면 위주 사고와도 거리가 있다. 이런 사고에서는 세상 만사가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성사적 시각에 근거해서 세상과 인간을 고찰하기와 이런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즉 세상 만물, 역사의 사건은 궁극적으로는 사라질 것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입장이다.


3.1. 구약성서


구약성서에 하느님의 누구이신지를 가장 명확하게 계시하는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이다. 에집트에서의 탈출, 홍해 바다를 건넘, 가나안 땅의 점령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즉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해방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자신이 야훼, 해방자, 구원자, 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이라는 것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신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출애급 사건을 해마다 빠스카 축제라는 구체적인 예식을 통해서 새롭게 기억하면서, 그들을 구원하신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뜻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율법(Tora)을 통해서이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이 선택됐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이 약속된 땅에서 성취된 삶이 가능케 하신다. 율법은 “너희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빈말이 아니고 […] 너희의 생명이다”(신명 31,47; 4,32-40 참조). 그래서 율법은 경신례에서 낭독되고(신명 31,10), 현자는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긴다(시편 1,2).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소중히 여겼다. 유배 이후에 이스라엘은 해마다 이른바 “율법 기쁨의 축제”에서 율법을 특별한 방식으로 기렸다: 율법서 두루마리를 율법상자에서 꺼내어 기쁨에 차서 행렬을 지어서 모시고 나갔다가, 다시 상자 속에 보관해 두었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상징 행동을 취하였다. 예를 들어서 호세아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는데, 이는 불충한 자신의 백성에 대한 야훼의 변함없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호세 3, 1-5; 1,2-9 참조).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명을 받아서 포로로 잡혀 가는 사람이 메는 보따리를 꾸려 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길을 떠남으로써 예루살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선포한다(에제 12,1 이하). 그리고 야훼는 에제키엘이 다음과 같이 선포하도록 위탁하신다 “나는 상징이다. 너희는 나의 몸짓을 보고 이 게례도 사로잡혀 가서 종살이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라”(에제 12,11). 바빌론의 침공에 직면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아는 근위대의 울 안에 갖혀서도 밭을 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이 행동은 이스라엘이 멸망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재건이 되어서 사람들이 다시 집, 밭, 포도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한다(예레 32, 6-15). “상징적인 행동과 그것이 의미하는 실재 사이에는 말하자면 ‘성사적 끈’이 존재한다 […] 예언자의 행동은 단지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사건을 담고 있는 행동, 즉 단지 인상적인 표지가 아니라 효력을 가져오는 행동이다”.1)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상징적인 성격을 띄고있다. 즉 에집트의 종살이에서의 해방, 시나이에서 율법의 수여, 가나안 땅의 점유, 바빌론 귀향살이에서의 귀환 등의 정치적인 사건을 통해서 해방시키고, 삶의 규범을 세우고, 땅을 주고, 용서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난다. 불행한 사건까지도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표징이 될 수 있다. 귀향살이까지도 하느님의 역사(役事)임이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였지만 당신을 배반한 이스 백성을 심판하시고, 다시 이끌어내심으로써 배반을 일삼는 인간과는 달리 충실한 분임이 드러난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증거해준다는 의미에서 성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의의 의미에서 창조된 세계 전체도 하느님 현존의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특히 “하느님의 모상”(창세 1,26 이하)으로 창조된 인간이 그러하다. 창조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능력과 자비를 나타내고 실제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서 시편 19,2에서는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인다”고 얘기하고 있다. 지혜서는 그 당시에 자연을 신격화하는 사조에 반해서 가시적인 세계를 상대화시키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상징의 구실도 인정하고 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그러나 기존의 세계는 단지 창조주의 흔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창세 3, 18), 힘든 노동(창세 3,19), 임신과 해산 때의 “고통”과 “아픔”(창세 3,16), 살인자에 대한 복수의 법 (창세 4,14), 다툼으로 드러나는 인간들의 불화(창세 4,23 이하)들은 창조된 세계가 인간의 죄 때문에 일그러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인간은 이중적인 표징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시고 능력에 찬 돌보심의 표징, 그러나 동시에 죄와 구원 필요성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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