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총론-종교개혁 시대의 논쟁

 

4.3.     종교개혁 시대의 논쟁




4.3.1.    종교개혁 당시의 성사 실천


종교개혁자들이 스콜라 신학의 성사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순수 신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중세 후기의 잘못된 신앙 실천의 배경도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사를 철저히 공동체의 전례로 이해하면서, 오로지 말씀의 선포, 표징 행동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신앙적 실행이 함께하는 곳에서만 성사가 그 의미를 갖고 구원 효과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렇게 당연시되었던 성사와 공동체와의 밀접한 연관은 게르만 족에 대한 전교가 시작되면서 달라졌다. 전례는 모국어로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말로 거행되었고, 이와 함께 성사는 온전히 성직자만의 행위로 변했다. 그래서 고대교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신자없이 사제 혼자 드리는 私미사의 관행이 생겨났고, 종교개혁 당시는 한 성당에 제대가 여럿 마련되어서 동시에 여러 대의 미사가 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私미사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거행된 미사도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공동체적 전례가 아니라 성직자 혼자의 전례였다: 신자들은 전례 용어를 이해하지 못한채 뒷전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공간적으로도 높은 계단이라든가 密室막이 등으로 제단과 신자들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평신도들에게 전례란 함께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망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사가 공동체와의 관련성을 잃어감에 따라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 성사를 그저 “치료약”(remedium)으로 보게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이런 성사 이해는 중세의 신자들이 신앙 생활의 중심을 더 이상 성찬례가 아니라 고해성사로 보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이렇게 일반 신자들이 유일하게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고해성사도 완벽을 강조하는 사목으로 인해서 그들에게 위로보다는 두려움을 더 주었다. 역사를 되돌이켜 볼 때 여기에서 종교개혁의 시작이 싹트게 되었다 (루터의 죄의식).


세례성사는 더 이상 고대교회에서처럼 새로운 구성원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공동체적 축제가 아니었다. 원죄을 강조함에 따라 어린 아이가 세례 전에 죽을까하는 두려움에서 아이의 탄생 후 급히 몇몇 사람이 모인 가운데 – 그래서 산모는 참석하지 못한채- 치루어지는 예식으로 변했다.


견진성사는 주교의 방문시에 가끔씩 거행됐고, 그나마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 경우가 많았다. 병자성사는 8세기 이후로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만이 받는 “종부성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병자성사가 성사를 받는 이의 고해를 포함하였고, 병에서 나을 경우는 일생동안 지속되는 무거운 보속을 실행해야만 하는 데에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일생동안 춤을 추지 못하고, 고기도 먹지 못하고 부부관계도 맺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지역에서는 병자성사를 받기 전에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성품성사는 그 이해와 실천에 있어서 성찬례 거행의 권한에로, 정확히 얘기하면,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축성권에로 집중되었다. 이 축성권은 사제직의 본질로 간주되었고, 이점에 있어서 신부와 주교의 차이는 없었다. 사제직에 이르기까지 부제품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품이 있었는데, 실제로 중요시 된 것은 품에 속하지는 않으나 성직 계열에로의 입문을 의미하는 삭발례였다. 삭발례는 성직자로서의 모든 권한과 특권을 부여하는데, 이는 후에 계속 다른 품을 받느냐 안 받느냐와는 관련이 없었다. 세월이 감에 따라 삭발례만 받고 성직자로서의 의무를 부과하는 다른 품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 또한 종교개혁의 실마리가 된다.


성사 실천에 있어서 선포되야하는 말씀의 가치가 무시되고, 한때는 “가시적인 말씀”이었던 성사가 순전히 예식적인 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예를 들어서 사제들은 서둘러 빵과 포도주 위에 십자표를 그음으로서 축성이 다 된듯 생각하였고, 미사 중에 전례 텍스트는 신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작은 소리로 낭송하였다. 이런 것들은 성사의 사효적 효력에 대한 가르침을 그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인간의 준비없이도 은총이 자동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 것처럼 부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성사가 공동체의 삶에서 유리될수록 성사 이외의 것, 즉 성사와는 별개의 것이나 성사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신심형태를 찾게되었다. 말하자면 성사의 대용물을 찾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속죄 행위로서의 성지순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고해성사 때에 받은 보속과 관련이 된다. 또 성체를 거의 영하지 못하는 대신 성체축성 이후 축성된 성체를 오랫동안 거양하는 관습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열광적인 성체거동 행렬과 이와 유사한 여러가지의 청원기도 행렬 등은 공동체적인 성찬례 대용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大赦의 판매에서 드러나듯이 신심생활을 상업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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