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총론-성사의 효력

 

5.4.    성사의 효력




5.4.1.  성사는 어떻게 효력을 내는가?


성사가 어떻게 효력을 내느냐는 데에 관해서는 이미 중세 이후 세 가지 중요한 입장이 형성되었다: 설비적 효과, 계약설, 도구적 효과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현대에 와서 너무 기계적이고 물리적이라는 비판을 받게되어 새로운 시도들이 제시되었다. 대표적으로 세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본다.


1) 전례운동의 선구자였던 카젤은 스콜라 신학에서처럼 성사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고찰하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성사 예절을 실행하면서 성사에 대해 접근하려고 하였다. 즉 성사를 질료, 형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서 각 성사의 전례 거행 전체에서 출발하였다. 왜냐하면 예절을 체험하면서 신자들은 그 예절을 실존적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전해지는 구원의 능력에 자신을 개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젤은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에 주의를 집중한다. 성체성사는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성사적 경륜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고 중심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카젤은 초세기 500년간의 희랍 교부들의 사상에로 돌아간다. 희랍 교부들은 성체성사와 세례성사에서 신비가 거행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고대의 秘敎 예식을 배경으로 한 이해였다. 고대의 비교 예식은 예식 안에서 한번 일어났던 사건이 재현, 현재화된다고 보면서, 그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건의 효과를 얻는다고 보았다.


이런 이해를 기초로 카젤은 성사를 삼 단계의 신비 사건으로 고찰하는 관점을 형성하였다: 신비의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의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이라는 유일회적인 신비는 두번째 단계인 예식의 신비를 통해서 현재화된다. 극적인 십자가 사건과 빈 무덤 사건은 예식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상징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실재적으로 ‘재현되고’, 새롭게되고, 현재화된다. 예식의 신비 안에서 현재화되는 파스카의 신비는 – 이로써 세번째 단계 – 참석자들이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참여하는 신비 혹은 구원 업적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동형화(同形化)의 신비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은 전례를 통해서 현재화되고, 신자들은 전례를 함께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참여하여 구원 은총을 얻는다는 것이다.




2) 성사의 효력에 대한 고찰에 있어 칼 라너는 이와는 아주 다른 길을 간다.1) 그가 사용하는 기본개념은 예식이나 신비가 아니라 말씀과 은총이다. 신학적으로 라너는 토마스를 통해서 전달된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아우구스티노는 성사를 ‘가시적인 말씀’(verbum visibile)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말씀의 역할을 중요시하였다.


라너는 모든 성사에서 결정적인 것은 말씀, 즉 성사 수여 정식이라고 주장한다: 가톨릭의 성사신학은 “성사의 근본 본질이 말씀이며 ‘질료’는 […] 말씀에 비해서 근본적으로 단지 이차적 역활, 즉 말씀을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로지 말씀 안에서만 실현되는 성사들이 있다. 그러므로 성사의 원래적 본질은 말씀 속에 있다”.2) 성사가 은총과 구원을 효력있게 전할 수 있는 근거는 성사를 수여하면서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발설되는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라너의 말씀의 신학이 자리한다: 하느님은 최종적인 절대성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은총을 결정적으로 선사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성사적인 原말씀 자체”3)이다. 교회의 성사들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原聖事性”에 그 근원을 두고, 능력과 효력을 얻는다. 즉 성사를 통한 말씀은 보통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육화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창조적이고 종말론적인 힘을 자신 안에 간직한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선포된 하느님 말씀은 여러 방식으로 단계적인 효력을 내는데, 성사 안에서 하느님 말씀은 최고의 효력을 낸다: “성사들은 은총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최고의 단계로 효력을 내며 사실화된 것이다”.4) 라너는 성사가 말씀의 최고의 실현 단계라는 관점에서 성사의 사효성을 설명한다. 성사의 사효성이란 “하느님이 말씀에 부여하신 압도적인 능력이 성사 안의 말씀을 통해 본래의 충만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5) 그래서 성사 안에서의 하느님 말씀은 “그저 단순한 제시”에 그치지 않고 (말씀의) “수용 그 자체를 이루도록”6)하는 은총의 말씀이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의 효과는 지속적이다. 즉 성사적으로 말하여진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은 “취소되지 않고”, “주어진채 머물러 있으며“, 수취자가 신앙의 응답을 하도록 계속 부르고, 촉구한다.7)


라너와 유사한 견해를 지닌 개신교 신학자들로서는 에벌링(G.Eberling)과 윙엘(E.Jüngel)이 있다. 물론 라너와 이들 사이에 차이점은 존재한다. 라너는 말씀이 최고로 실현된 형태가 성사라고 보지만, 이들은 성사는 말씀 사건의 특별한 한 형태일뿐이라고 간주한다.8)




라너의 주장에서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점은 개신교의 전유물로 여겼던 말씀의 신학이 가톨릭 신학에서도 자리를 잡게 됐다는 사실이다. 교의신학 안에서 불과 몇십년전부터 자리를 잡게된 말씀의 신학은 사실상 성서에 광범위하게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에서 성사는 표시하는 바를 실현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특성은 분명히 말씀, 즉 하느님 말씀에도 적용된다.


* 하느님 말씀은 창조적인 말씀이다: 창세 1, 3; 이사 48, 13; 시편 33, 9; 로마 4, 17.


* 하느님 말씀은 관계를 이룩하는 말씀이다: 출애 19장 이하; 20,22.


* 말씀은 인간을 만나고, 그를 변화시키고, 반항하는 인간을 압도한다: 예레 1,4-9: 에제2,1-3,3.


* 예언자의 말은 하느님 말씀의 변화시키고, 창조하는 힘을 나누어 받는다:이사 55,10 이하.




3) 스킬러벡스는 성사를 하느님, 혹은 그리스도와 개개 신앙인의 인격적인 만남의 순간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성사 거행의 최종적 주체(토마스는 “주 원인”이라고 하였다)인 하느님은 인격을 갖춘 한 인간처럼 행동한다고 상정한다. 인간의 만남은 명백히 볼 수 있는 신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런 점에서 신체는 인간의 내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지이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께서도 인간과의 만남의 역사에서 구원을 주는 당신 존재의 비밀을 육신적인 형태를 통해서 인간에게 알린다.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인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구원 은총의 인격적이고 가시적인 현시”9)이다. 그를 통해서 인간을 만나고자 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역사적 사실로, 그리고 인간적인 육체성 안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에 직접적인 의사 소통의 매개물인 예수의 육체는 우리의 지상 생활에서 사라졌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과의 만남이 더 이상 가능하겠는가? 스킬러벡스에 의하면 이는 성사를 통해서 가능하다. “성사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육체의 지상적 연장”으로써 “영광을 받으신 인간 예수와 지상에 머무르는 인간 사이에 가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교회의 성사 안에서 “천상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위한 당신의 계속적인 중개와 당신의 능동적인 은총의 선물을 모두 성사화시킨다”.10) 그러므로 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위한 지속적인 장소요 수단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사를 통한 은총의 수취가 항상 가능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의 제도적인 행위의 형태로써 대하는 “성사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적 행위”이기 때문이다.11)


토마스의 추종자인 스킬러벡스는 성사의 효과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토미즘의 인과적 사고방식을 탈피하고자 한다. 그 대신 현대의 인격주의적인 사상을 빌려서, 스스로를 전달하는 사랑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인간적인 만남에서 있어서 사랑의 가시적인 표현은 호소와 제안을 의미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사랑을 물리적으로 야기하지는 않는다. 사랑이란 자유로이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작은 호소하고 초대하며 희구하는 것으로 하나의 제안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이러한 동작은 어떤 효과를 낸다. 그 동작은 사랑과는 무관한 표징이 아니라 사랑을 강하게 불러내는 표징이다. 힘 있는 악수는 그것과 상응한 악수를 자연적으로 유도한다”.12) 스킬러벡스는 이렇게 인격적인 만남의 형태를 근거로 해서 성사가 지시하는 바와 성사의 효과가 일치함을 설명한다.


성사들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호의를 드러내는 동작과 같다. 그런 의미로서 성사는 전적으로 대응적 사랑의 표시를 바라고 있다. 성사가 교회 안에서 수취자에게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의 준비 자세를 호소할 때 바로 이 대응적 사랑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라너가 강조한 원칙, 즉 하느님의 은총 제시는 인간 편에서의 수용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분명히 적용된다. 그러나 스킬러벡스의 사고 단계는 이를 넘어서 자유로운 만남의 존재로서의 인간 고유의 몫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 은총 제시의 수취자가 완전히 수동적으로 성사의 작용에 자신을 맡겨버린다면 진정한 만남이 성립된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스킬러벡스는 자세히 규정짓지는 않았으나 말씀의 상호성에 대해, “상호작용”(Interaktion)에 대해 언급한다:


전통적인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성사를 받는 사람의 내면적인 종교적 의향이 성사의 유효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다 […] 그러나 […] 성사를 받는 사람이 성사를 위한 기도와 성사 집행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내적인 노력은 그저 단순하게 성사를 준비하는 마음의 태도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성사적 예식 신비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이 대목을 자세히 설명해야만 한다. 모든 성사 거행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이루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만남은 쌍방이 함께 참여해야만 하기 때문에 성사를 받는 사람 (이때는 만나려고 하는 사람)의 신앙적인 자세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으로서의 성사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13) 이런 배경에서 스킬러벡스는 말하기를, 신자들이 이렇게 인격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생의 역사와 함께 참여함이 없는 예식이라면 그 예식은 그저 “허위의 표징”14)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사의 사효성과 인간의 준비 자세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예식이 수행됨으로 말미암아 은총이 틀림없이 부여된다면 과연 인간의 준비는 필요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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