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성지


배티성지 안내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가 배출된 곳이고, 조선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의 행정명칭은 양백리 이티였지만 지금은 배티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배티라는 지명은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고개라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배티로 숨어들어온 신자들에 의해 1830년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1850년에는 성 다블뤼 주교님께서 이곳에 신학교를 설립하시게 됩니다. 베티는 1830년 전후로 교우촌이 형성되고, 1837년 5월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님이 이곳을 \”배티 공소\”로 만드십니다.

1850년 제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님께서 조선교구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850년 9월 교장신부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가 이곳에 방 2칸 짜리 집을 매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티 교우촌은 다블뤼 신부의 사목 중심지가 됩니다. 1851년 다블뤼 교장 신부와 신학생들이 배티 신학교에 거주하게 되고, 1853년 여름에 성 다블뤼 신부의 사목 순방으로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배티 신학생들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티 교우촌이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가 됩니다. 1854년 3월에 최양업 신부님은 배티 신학생 3명을 말레이시아 패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고 배티 신학교는 폐쇄됩니다.

 

이 배티에 최양업(토마스) 신부님과 프랑스 선교사 프티나콜라 신부님, 페롱 신부님이 1853년부터 1864년까지 배티 신학교 건물을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삼았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수많은 순교자가 배티와 인근 지역에서 탄생하여 순교자 묘가 안장되었습니다. 6기의 치명자 묘소가 있지만, 누구의 묘소인지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고, 그 외 7기의 묘소가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870년부터 다시 신앙이 싹터 1884년에는 선교사들이 진천에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등 5곳에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 배티에는 신자들이 생업을 영위하던 옹기점과 무명순교자의 묘 만이 남아있었다가 이렇게 성지가 개발되어 순례자들에게 순교신심을 키워주는 곳으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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