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사업 [한] 救癩事業

나병(癩病)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 유전병으로 생각하여, 나환자는 하늘의 형벌을 받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1873년 한센(G.A. Hansen)에 의해 나균(癩菌, Mycobacterium Marianum)이 발견되고, 1941년 설파제가 발명되어 나병치료에 확신을 얻게 되면서 나병을 더 이상 천형병(天形病), 유전병(遺傳病)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나병에 대한 인식은 신구약시대를 전기로 하여 변화하였다. 구약시대에는 나병을 죄가 형상화된 것으로 보거나 사탄이 들린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자’라고 선언당했으며, 촌락에서 쫓겨나 살아야 했다(레위 13:1-14, 민수 5:2, 애가 4:15, 욥기 2: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나환자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소외에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이들을 치유해 주었다(마태 8:1-4, 마르 1:40-45, 루가 5:12-16).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병환자를 고쳐 주라고 분명히 지시하였다(마태 10:5-8, 마르 6:7-13, 루가 9:1-6). 교회의 구라사업은 이상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고, 사도들에 의해 계승되어 내려왔다.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에 전파된 나병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의 제주, 경상, 전라지방에 전파된 시기는 대체로 1058년 고려 문종 때다. 이들에 대한 구제사업은 조선시대부터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1449년(세종 31년) 제주 3읍에 치병소를 설치한 일이라든지, 1451년(문종 2년)과 1622년(광해군 14년)의 기록들은 국가가 구라사업을 전개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라사업은 분리수용과 초보적인 치료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근대적인 구라사업은 조선말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즉 우리나라에 파견된 대부부의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중국에서의 선교를 통하여 이미 구라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구라사업 등의 사회사업이 선교에 미치는 영향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선교사들의 구라사업은 공개적인 형태를 취할 수 없었다. 그 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천주교의 구라사업도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당 중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사업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나환자 수는 소록도에 5,407명, 여수 애양원에 663명, 대구 애락원에 644명 등의 수용인원과 전국 각지에 숨어살던 환자를 포함하여 모두 8,000여명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난 많은 환자들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의 궁핍 속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톨릭은 구라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계가톨릭구제회(NCWC)와 손잡고 적극적인 구라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메리놀회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의 활약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캐롤 신부는 1950년 6월 2일 서울 오류동(현 광명시)에 성 나자로원을 창설하여 서울 부근에 부랑하던 나환자의 구호에 나섰다. 그러나 6.25사변의 발발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서울교구에서는 1952년 3월 9일 처음으로 이경재(이경재, 알렉산데르) 신부를 구라사업 전임자로 임명하여 성 나자로원의 초대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교구들도 구라사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구라사업을 공동으로 전개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55년 메리놀회 스위니(Sweeny, 徐) 신부의 입국과 함께 구라사업도 활기를 띠게 된다. 스위니 신부는 중국 본토에서 오랫동안 구라사업에 종사하던 신부로 입국과 함께 ‘천주교구라회’를 창립하여 요양기관 수용환자를 제외한 나환자들을 위하여 이동진료반을 편성하여 전국 순회진료도 하였고, 성 나자로원에 사무소를 두고, 경남 고성, 경북 영일, 충북 옥천, 등지에 진료 및 구호소를 두어 나환자 진료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들 진료소가 뒷날 고성성모병원, 옥천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1958년 성 나자로원은 경기도 시흥의 세브란스 결핵요양소를 매입하여 이전하였고, 프란치스코회가 산청에 성심인애병원(1959년), 칠곡에 가톨릭피부과의원(1960년)을, 전주교구와 프랑스 국제농촌개발협조회(CIDR)가 공동으로 이리성모병원(1960년)을, 베네딕토회가 성주성심의원(1962년), 대구파티마병원(1966년)을, 벨기에 다미안재단이 영주다미안의원(1974년)을 각각 설립하여 구라사업을 담당하게 하였다. 한편 1961년에는 이들 치료기관을 지원하기 위한 만성병연구소가 가톨릭중앙의료원에 개설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외원기관(外援機關)도 상륙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구라사업을 지원하였다. 1959년 서독구라회(DAHW)가 한국에 진출, 1966년 왜관 베네딕토수도원에 주한 대표부를 설치하였고, 1961년 오스트리아부인회(오지리부인회), 1971년 다미안재단이 각각 대구와 안동에 한국지부를 설립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구라사업은 나환자의 수용보호 및 치료 이외에도 자활 가능한 나환자의 사회 복귀를 위한 정착사업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46년 경남 하동에 영신원(永信園)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하여 1952년에 동혜원(同惠園), 왜관의 베다니아원, 1953년에 현애원(玄愛園), 호혜원(互惠園), 동진원(東震園), 성화원(聖和園), 1954년에 성신원(聖信園), 경천원(敬天園), 계명원(啓明園), 성광원(星光園), 1958년에 성심원(聖心園), 1959년에 상지원(上智園), 신애원(信愛園) 등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천주교의 자활정착사업이 효과를 거두자 정부에서는 나병강제격리수용법을 폐지하게 되었다. 1960년대 설립된 정착촌으로는 1961년의 은양원(恩養園), 비룡원(飛龍園), 1962년의 의왕갱화원(更化園). 십정 일광정착사업장, 1963년의 신락원(信樂園), 천자원(天慈園), 1964년의 성애원(星愛園)이 있다.

이렇게 구라사업이 점차 확대되자 각 사업기관 사이의 연대의식을 고취하고, 사업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연합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7년 10월 8일 전국의 가톨릭 구라사업기관이 모여 ‘한국 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주교단은 1968년 1월 ‘세계 나병의 날’을 맞아 매년 1월 마지막 주일을 한국의 ‘구라주일’로 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1970년 2월 3일 구라사업을 후원하기 위한 릴리회(김광자 창설)가 조직되었고, 잇달아 라자로동기회, 상록회, 미라회, 다미회 등의 후원회도 발족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톨릭사업은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를 구심점으로 하여 회원기관 12개소, 봉사수도회 12개소, 불구자보호시설 2개소, 외래진료소 및 요양원 7개소, 이동진료반 5개 팀이 활동하고 있으며 전국 38개 정착마을을 지원하고 있다.

[참고문헌] 라자로마을회보, 1~4호, 성라자로마을 / 葛勝鐵 · 柳駿, 韓國癩病의 歷史的 考察, 癩學會誌, 1권 1호, 1960 / 柳駿 · 鄭玫, 韓國癩病의 疫學的 硏究, 癩學會誌, 3권 1호, 1965 / 한국가톨릭나사업가연합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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