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본질은 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 구성원의 안정과 평화를 도모하는 데 있다. 따라서 국가이든 교회이든 어떠한 공동체에서나 권력이나 권위가 꼭 필요한 것이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권력과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 권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권력은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의 안정, 질서, 평화, 행복을 그 지상의 목표로 삼아야 하고 더 나아가 정의의 확립, 국민의 일반복지의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권력을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는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기 때문에 권력이 남용되고 악용되어 공동체 구성원의 인권이 유린되고 공동선(共同善)보다도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이며 권력의 본질적 가치의 전도(顚倒)를 의미한다. 권력의 가치가 전도하면 타인이 소유하고 있거나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힘으로써 위협하거나 박탈하게 된다.
권력의 남용은 위선, 기만, 음모, 폭력, 잔악, 공포, 부패, 특권, 고집 등으로 나타나며 이것을 흔히 ‘권력의 치욕(恥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권력의 전도는 특히 국가 권력이나 정치 권력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국가 권력의 본질적 사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 내에 있는 개인과 단체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는 데 있다. 국가 권력의 본질적 사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 내에 있는 개인과 단체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는 데 있다. 국가 권력이 국가 안에 있는 개인과 단체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면 국가의 공동선이 위태로워진다. 공동선은 개인, 가정, 단체, 국가가 보다 완전하게 자기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모든 조건들의 총체(總體)이기 때문에 국가 권력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다. 따라서 공동선을 위하여,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개인이나 국가 권력도 제약받는 것이다. 국가 권력은 이념의 최고의 화신(化身)도 아니고 초인적(超人的)인 힘도 아니며 오직 인간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다. 즉 인간이 국가 권력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 권력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권력은 근원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인지 군림(君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비오 12세는 “국가 권력은 사회생활을 질서있게 하고 인간의 인격을 한층 쉽게 육체적 지적 도덕적 완성의 달성을 돕는 데 있다. 국가 권력의 특권과 사명은 모든 생활을 조화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국가 권력은 단지 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국민의 인격적 성장을 도와주어야 한다. 국가 권력의 근본적인 책임은 인간들 사이에 개재(介在)하는 관계들을 적절하고 적합하게 조정하고 지도하며 일부 사람들의 권리행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J. Maritain, 인간과 국가).
국가 권력의 임무는 그 구성원에게 공동선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과하는 데 있다. 사람의 몸에 있어서 지체(肢體)의 역할이 다른 것처럼 국가에도 여러 가지 지체가 있다. 따라서 국가 권력은 그 지체들이 그 사회적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국가권력이 지체들의 기능을 억압하거나 흡수해 버리는 것은 국가 권력의 월권(越權)이며 남용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권력은 그 구성원을 강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구성원이 이상을 갖고 자유롭게 협동하여 공동성을 달성하는 데 있다. 어떠한 권력도 인간을 전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다. 권력은 도덕적 힘이어야 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구성원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공동선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에 있어서 공동선의 증진은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보장하는 데 있으므로 국가 권력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권리를 인정하고 옹호하며 촉진함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국가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보조적 제도에 불과하므로 국가 권력의 존재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이 지상에서 실현한다는 데에 그 당위성이 있다. 국가 권력은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킬 의무가 있다. 국가 권력은 국민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조정해야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하고 국제사회에 있어서도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특히 선진국의 국가 지도자들은 후진국을 위하여 물질적 정신적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국가 권력은 전체 국민의 물질적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 물론 이것은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자유스런 계약에 달려 있다. 그러나 두 당사자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있을 경우 국가 권력은 이에 개입하여 정의의 규준에 따라 화해시키고 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의 보수가 정의와 공평의 원칙에 적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을 필요로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의의 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레오 13세는 “국가 권력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권위를 가진 사람은 공동선을 위하여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면 공동선은 사회의 맨 처음이자 마지막의 법이다”라고 하였다. 비오 11세는 “권력자는 사회와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특히 약한 자, 가난한 자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는 그가 가지는 부(富)로써 자기를 방어하기 때문에 국가의 보호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였다. 모든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느님의 최고 권위에 대한 참여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위는 자부적(慈父的)이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둔다. 따라서 국가 권력이 특별히 배려해야 할 계층은 약자이어야 한다.
또한 권력에의 복종은 양심적이어야 한다. 권력이 인간의 양심을 유린하면서 행사될 때 그 권력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불법한 법이 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실지로 힘이 되는 것은 그것이 정의의 규준에 합당할 때만 강력한 것이다. 정의와 권력이 공존할 때 비로소 그 권력은 하느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고 사회 내에 조화와 평등을 재조명하여 인간의 완성을 도모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권력은 결코 윤리적으로 무관한 실재가 아니다. 권력은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능력이 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목표를 달성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적극적인 원천이 될 수 있다. 권력자들은 자기 권력의 힘 또는 그것이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부정하거나 무관심하면서 그럴듯한 구호로 위장하기가 쉽다. 그런가 하면 권력자는 피지배자에게 무거운 압박을 주면서 자기의 도덕적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획득의 방법도 도덕적이라야 한다. 권력획득의 과정이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일 때 그 권력은 근본적으로 당위성을 가지지 못한다.
정치 권력은 위엄(威嚴)의 표지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이 하느님의 힘을 대표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인민 즉 민중의 생활과 같이 하려는 그들의 공동 의지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국가는 개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들이 정치 단체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성에 맞도록 결합하여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지키도록 결속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은 이러한 구성원의 공동 의지를 기초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힘을 가질 수 없다. 국가 권력이 그 구성원이나 단체의 기능을 억압하거나 박탈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통제도 가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보다 오히려 위험스러운 것이다. 국가권력이 어떠한 전체주의적 유혹에 빠져 그 본질적 한계를 벗어나 양심의 지성소(至聖所) 속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항상 거짓말과 압박을 가하게 된다. 국가 권력은 법을 통해서 행사된다. 그러나 법이 이성과 상반되고 있을 때 그 구속력이 상실된다. 따라서 양심과 이성에 합당치 않은 법에 대하여 복종할 의무가 없다. 권력이나 법이 정의, 공동선, 양심, 이성 즉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저촉될 때 국민은 거기에 순종할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힘에 의하여 인권이 억압되었을 때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저항권(抵抗權)은 인간의 권리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 저항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 양심과 이성의 존엄성이 짓밟힐 때 그것을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은 반역(反逆)이 아니다. 반역의 개념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느냐 안맞느냐에 따라 규정지어질 문제이지 권력자의 의사에 따라 규정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의 측면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가 권력의 절대화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국가는 하느님의 질서의 수호자이며 일반 종교의 표현을 쓰면 진리의 수호자이지 그 이상일 수는 없다. 신학적으로 볼 때 국가는 창조의 질서가 아니고 보존(保存)의 질서다. 여기에 국가 권력의 한계가 있다. 국가 권력은 어떤 가치관을 창조할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 권력 자체가 법이나 윤리를 만들어 낼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주어진 법이나 윤리적 가치를 수호할 따름이다. 이것은 국가 권력이 인간의 본래의 권리를 침해 할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구약성서는 온 정력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서 자기 존재를 조금이라도 유보(留保)시킬 수 없다. 인간이 국가 권력에 순종하는 것은 그 권력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왔다는 전제하에서다. 따라서 국가는 하느님과 동등한 서열(序列)에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못한다. 항상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하느님이 승인하는 범위 안에서 국가 권력과 관계를 맺는다. 하느님이냐 카이사르냐 하는 양자택일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이 말하듯이 인간은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며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獻身)이 허락하는 한에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국가 권력은 세속적 사항에 있어서는 독립성을 가질 수 있으나 신앙과 윤리의 문제까지 간섭하거나 독점할 수는 없다.
권력의 문제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권위의 문제와 직결된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권위는 남을 섬기는 일 즉 봉사를 의미한다(마르 10:41-45). 따라서 권위자는 교회의 성장에 이바지하고 복음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인격을 성숙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권위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봉사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고 공동체의 일치의 원천이 되고 표지(標識)가 되어야 한다. 권위자는 특권의 소유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고무, 격려, 조화시키면서 합당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특히 권위자가 유의하여야 할 점은 그 구성원과 대화를 통하여 사귐을 이루고 수하자(手下者)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령이나 지시보다 설득을 통하여 일치를 가져오는 영성(靈性)이 요구되며 구성원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권위자는 획일주의를 버리고 어떠한 특수상황에 알맞은 방법으로 봉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 안에서 때때로 권위에 대한 도전(桃戰)이 일어난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을 때 권위자는 그것을 배격하기 보다는 경청(傾聽)할 슬기가 요구된다. 도전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일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 내에서 참다운 도전이 없을 때 교회는 때때로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참다운 도전은 분열보다도 일치를 가져온다는 것을 권위자는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남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러 왔으며, 교황은 자기를 ‘종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의 권위가 겸손에 바탕을 둘 때만이 참다운 권위로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말이다. 권위자가 명심해야 할 일은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 따라서 누구나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하자는 노예도 아니고 도구도 아니다. 순종은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이지 겉으로만의 순종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가 권력이나 교회 안에서의 권위나 모두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적 차원에서 그 힘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다. 그러기에 권력자나 권위자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며 결코 억압하거나 부자유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권위자는 자기의 의사가 무조건 다른 쪽에 승인되기를 바라고 있으나 참다운 권위는 수하자의 승인과 동의(同意)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권위의 행사가 강제로 의미해서는 결코 안 된다. 권력자와 권위자는 수하자를 계급관계로 취급하지 말고, 함께 걸어가면서 길을 비추어 주는 사람으로 불 때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 교인적인 것이다. 권력이 신화화(神話化)하는 시대는 끝났다. 권력은 오직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고 인격화하고 사회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韓庸熙)
[참고문헌] 韓庸熙,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사목헌장, 제2목 제4장 / J. 회프너,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출판서, 1979 / 사회정의, 가톨릭출판사, 19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