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1 [라] Gregorius

① 타우마투르구스의~ (G. Thaumaturgus, 213~270?). 성인. 축일은 11월 17일. 소아시아 폰투스(Pontus)주(州) 네오카에자레아의 주교. 타우마투르구스란 ‘기적행사자’란 뜻이다. 당초 로마법을 공부했지만 233년경 팔레스티나의 카에자레아에서 오리제네스의 학교에 입학, 그의 인격과 학식에 경도(傾倒)하여, 그 후 파에디모로부터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는 238년에 학교를 떠나면서 은사인 오리제네스를 찬양 · 감사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사사≫(謝辭, Eis Origenen prosphonetikos kai Panegurikos logos)이다. 그는 네오카에자레아의 주교로서 폰투스 지방에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로마황제 데치우스(Decius, 재위 : 249~251)의 박해 때는 일족을 이끌고 산속에 피신, 고초를 겪어 후세에 순교자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앞의 ≪사사≫외에 ≪성일신의 신앙고백≫(Ekthesis pisteos), ≪종규적 서한≫(宗規的 書翰, Epistole kanonikes), ≪전도서석의≫(傳道書釋義, Metaphrasis eis ton ekklesiasten) 등이 있다.

② 나치안츠의~ (G. Nazianzenus, 329?~389/90).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 ‘크리스천 데모스테네스’로 불린 웅변적 설교가. 동방교회 4대학자의 한사람(다른 세 사람은 아나스타시오, 크리소스토모, 치릴로). ‘신학자’로 호칭된 정통파 교부. 부친도 같은 이름으로 카파도치아 나치안츠의 주교였다. 그는 카파도치아의 카이자리아, 팔레스티나의 카이자리아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등지에서 면학(356/357년), 아테네 시절의 학우로 대(大)바실리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55년)가 있었다. 귀향 후에 수도사가 되고 싶었으나 부친의 교회에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362년). 이것이 싫어서 도망했다가 돌아와 ≪도피의 변명서≫를 썼다. 바실리오에 의해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추대되었으나(372/73년), 사양하였고 부친이 죽은(374년) 뒤 나치안츠의 주교직을 계승했으나 이것도 곧 그만두고 은수(隱修)생활에 들어갔다. 아리우스파(派)인 발렌스 황제(재위 : 364~378)의 사후, 아리우스파의 아성인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압박당하고 있던 니체아 소수파의 강력한 요망에 따라 수도로 갔다(379년). 그의 웅변은 데오도시우스 1세의 공동신앙 신봉령(380년)과 아울러 마침내 정통파 신앙을 승리로 이끌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정식으로 주교에 취임했으나 반대에 부딪쳐 사임하고, 네크타리오스(Nektarios)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레고리오는 귀향 후 은수생활을 하면서(384년) 니체아 신앙의 완성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일세를 풍미한 웅변가이긴 했으나 바실리오와는 달리, 교회정치가는 아니었다. 은수사적인 경건함과 시적인 휴머니즘에 넘치는 신학자로서 성서와 전승(傳承)에 철저히 입각하였다. 신관(神觀)에 있어서는 삼위일체론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아버지는 태어나지 않은 것’, ‘자식은 태어난 것’, ‘성령은 발생된 것’이라는 3자의 규정은 오늘날에도 답습되고 있다. 특히 성령의 규정과 그 신성 증시(神性證示)에 공헌하였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아폴리나리오스(Apollinarios)가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인간 이성 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 데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人性, 영혼체)을 주장하였으며, ‘하나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성(神性)과 인성의 결합’을 강조하여 칼체돈 그리스도론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저작에는 45편의 강연, 설교집(아리우스파 · 마케도니오스파 · 에우노미오스파를 반박한 것, 니체아 신앙을 옹호한 것), 244통의 서한, 약 400편의 시집이 남아 있다.

③ 니사의~ (G. Nyssenus, 332?~395?).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 대(大)바실리오의 동생. 니체아 그리스도론의 완성자.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이며 맏형과 같은 이름인 바실리오와 동생 베드로(Petros, 세파스테의) 및 그 자신이 모두 주교(主敎)였고, 맏누이 마크리나(Macrina)는 수녀원장,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자리아에서 태어나 맏형과 같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어 독학을 한 것 같다. 웅변가라는 화려한 직업을 버리고 형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형이 카파도키아의 카이자리아 주교가 되자(370년), 그 근교 니사의 주교로 추거(推擧)되어(371년), 무명했던 니사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적, 동질적의 뜻)의 아성으로 유명해졌다. 아리우스파인 발렌스 황제(재위 : 364~378)는 전통파 압박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그는 교회 내외의 아리우스파의 책모로 인해 마침내 추방당하였다가(375년), 황제의 사후에 복직되었다(378년). 안티오키아 회의(379년)에 출석, 또한 아라비아 · 팔레스티나를 순력(巡歷)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 출석,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의 주교 취임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 379~395)로부터 정통파의 기둥 같은 존재로 인정받고, 그의 분투에 의해 아폴리나리오스파는 이단(異端)으로 선고되었다. 그 후 적어도 세 번 콘스탄티노플의 지방회의(383, 385, 394년)에 출석하였다.

그는 오리제네스 이래의 조직신학자이며, 카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서 제일 심오한 철학적 신학자.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형 바실리오와 똑같은 입장. 그가 ‘본질’(本質)과 ‘위격’(位格)을 구별하여(362년경의 아타나시오는 양자를 동일시), 1본질 3인격(mia ousia, treis Hypostaseis, 삼위일체)을 주장한 것은 불멸의 공헌이다. ‘성령론’(聖靈論)에 대해서는, 성령은 자식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1인격에서의 결합(2성 1인격)을 주장했으며(후세의 칼체돈 그리스도론과 동일 결론), 마리아론에 있어서는 ‘만물의 부흥’을 주장하였다. 통틀어 그의 사상은 신비주의 색채가 매우 짙다.

그는 카파도치아 교부들 중의 유일한 저술가이다. ㉮ 교리적 저술 ≪Adversus eunomium≫(4권, 380~383?), ≪Adversus Apollinaristas≫, ≪Sermo de Spiritu Sancto adversus Pneumatomachus Macedonianos≫, ㉯ 강해적(講解的) 저술 ≪De opificio hominis≫, ≪In hexameron≫, ㉰ 수덕적(修德的) 저술 ≪De virginitate≫, ≪De instituto Christiano≫, ≪Vita Macrinae≫, ㉱ 연설 · 설교집, ㉲ 서한집으로 30통의 편지가 잔존.

④ 투르의~ (G. Turonensis, 540?~594). 프랑크의 성직자, 역사가. 본명 Georgius Florentius. 증조부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오로 개명하였다. 프랑스의 오베르뉘에서 태어나 아우스트라시아왕 시즈베르(Sigebert, ?~575) 밑에서 일하다가 투르의 주교로 천거되어(573년), 메로빙 왕조의 유력자가 되었다. 투르의 수호성인 마르티노의 대성당을 재건하였다(590년). 명저 ≪프랑스사≫(Historia Francorum, 10권, 576~592)는 메로빙 왕조의 사적(事績)을 아는 데 유일한 중요자료이다. 또한 그가 저술한 성자전집(聖者傳集)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잔존한다. ≪In gloriam martyrum≫(우리 주, 사도, 특히 갈리아인 순교자의 기적에 관하여, 586), ≪De virtutibus S. Juliani≫(성 율리아노의 묘의 기적, 582~586), ≪De virtutibus S. Martini≫(성 마르티노의 묘의 기적, 4권, 574~594), ≪De vita patrum≫(갈리아인 성도 23인의 생애, 594), ≪In gloriam confessorum≫(고백자의 기적, 588). 그는 성실하고 초자연적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설교에 의해 널리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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