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파견하신 분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1. 말씀읽기:루카10,13-16: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마태 11,20-24)
2. 말씀연구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으시므로 동네들을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으심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내가 심판받을 때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받아들인 다면 나는 심판 때 커다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혜를 받고 있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등의 도시들을, 옛날부터 저주받은 도시의 대표로 여겨지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에 대조시키십니다. 팔레스티나의 북쪽 지방에 있는 티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인 도시들은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으로 예언서에 잘 나오는 도시들입니다.
베옷을 입고 앉아서 재를 들쓰고 있다는 것은 회개의 가장 뚜렷한 징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초자연적 보증인 기적을 보았다면 믿고 회개를 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벳사이다는 요르단강이 티베리아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 동쪽 2키로, 현재의 엘 아라디에 있었다고 합니다. 필립보 분국왕이 이와 똑같은 이름의 도시를 세워 아우구스토 황제의 공주 유리아의 이름을 기념하여 벳사이다 유리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유적은 엘 아라디의 북쪽 2키로, 에도 텔이라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심판 날에 분명히 밝혀질 것입니다.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시 전체에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민 전체가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물론 인격적인 만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항상 개인이며, 그가 신앙에 이르는 것도 개인으로서 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를 위해 있는 것이며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티로와 시돈은 이교인의 동네로서 유다인들은 이 동네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완전히 빠져 버린 곳으로 간주하였으며 갈릴래아의 다른 동네들이 받은 은총을 받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두 동네를 방문하여 은총을 베푸셨다면 그들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 채 회개하였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음탕하고 악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지구상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만일 이방인 도시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소돔도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목격했더라면 틀림없이 오늘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카파르나움의 회당과 율법학자의 학교는 상당히 유명했습니다. 더욱 이 사회 출신들이, 유난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학교에서 수업하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은 교만에 가득 차서 예수님의 업적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더라면 소돔도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파르나움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정식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적중하여 현대의 고고학자가 이 도읍의 폐허는 물론, 일찍이 존재하고 있던 장소조차 알아내지 못할 만큼 멸망하였습니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파견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파견한 사람을 대신합니다. 사자들과 함께 오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이 오십니다. 사자들의 말을 환영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환영하거나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을 환영하거나 배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말씀을 경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형제 하나를 물리치는 것은 예수님을 물리치는 것이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형제 하나가 나에게 신앙생활을 권면하고 이끌어 주려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결국 구원을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파멸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칭찬한다는 것은 내가 그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잘된 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니 나 또한 그릇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통해서 내가 그보다 못하게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옆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을 때, 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옆 사람이 나를 칭찬해 줄 수 있도록 내가 나를 좀더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와 성찰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다면 나는 칭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날 것입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내가 저지르기 쉬운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불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느 순간 교만에 가득 차서 하느님께 반항을 하게 되고, 그분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 그래서 결국 하느님을 거부하게 되는, 아니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2.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내 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사람입니까? 그리고 나는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파견하신 분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1. 말씀읽기:루카10,13-16: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마태 11,20-24)
2. 말씀연구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올바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으시므로 동네들을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으심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내가 심판받을 때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받아들인 다면 나는 심판 때 커다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혜를 받고 있던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등의 도시들을, 옛날부터 저주받은 도시의 대표로 여겨지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에 대조시키십니다. 팔레스티나의 북쪽 지방에 있는 티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인 도시들은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으로 예언서에 잘 나오는 도시들입니다.
베옷을 입고 앉아서 재를 들쓰고 있다는 것은 회개의 가장 뚜렷한 징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초자연적 보증인 기적을 보았다면 믿고 회개를 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벳사이다는 요르단강이 티베리아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 동쪽 2키로, 현재의 엘 아라디에 있었다고 합니다. 필립보 분국왕이 이와 똑같은 이름의 도시를 세워 아우구스토 황제의 공주 유리아의 이름을 기념하여 벳사이다 유리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유적은 엘 아라디의 북쪽 2키로, 에도 텔이라는 곳에 있다고 합니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심판 날에 분명히 밝혀질 것입니다.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도시 전체에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민 전체가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물론 인격적인 만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항상 개인이며, 그가 신앙에 이르는 것도 개인으로서 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를 위해 있는 것이며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티로와 시돈은 이교인의 동네로서 유다인들은 이 동네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완전히 빠져 버린 곳으로 간주하였으며 갈릴래아의 다른 동네들이 받은 은총을 받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두 동네를 방문하여 은총을 베푸셨다면 그들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 채 회개하였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음탕하고 악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지구상에서 지워져 버렸습니다. 만일 이방인 도시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소돔도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목격했더라면 틀림없이 오늘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카파르나움의 회당과 율법학자의 학교는 상당히 유명했습니다. 더욱 이 사회 출신들이, 유난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학교에서 수업하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은 교만에 가득 차서 예수님의 업적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더라면 소돔도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파르나움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정식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적중하여 현대의 고고학자가 이 도읍의 폐허는 물론, 일찍이 존재하고 있던 장소조차 알아내지 못할 만큼 멸망하였습니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파견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파견한 사람을 대신합니다. 사자들과 함께 오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이 오십니다. 사자들의 말을 환영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환영하거나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을 환영하거나 배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말씀을 경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형제 하나를 물리치는 것은 예수님을 물리치는 것이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형제 하나가 나에게 신앙생활을 권면하고 이끌어 주려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결국 구원을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파멸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칭찬한다는 것은 내가 그보다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잘된 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니 나 또한 그릇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통해서 내가 그보다 못하게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옆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을 때, 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옆 사람이 나를 칭찬해 줄 수 있도록 내가 나를 좀더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와 성찰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다면 나는 칭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날 것입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내가 저지르기 쉬운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불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느 순간 교만에 가득 차서 하느님께 반항을 하게 되고, 그분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 그래서 결국 하느님을 거부하게 되는, 아니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2.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내 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사람입니까? 그리고 나는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