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5,11-32 :탕자의 귀향

 

탕자의 귀향

1. 말씀읽기:루카 15,11-32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죄인 하나의 회개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께서는 전하시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와 잃었던 은전의 비유와 그리고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이 이야기는 두 형제를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를 지닌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선하시고, 두 아들을 사랑하시며,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달려 나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두  사람(회개한 죄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한 식탁에 앉아서 자신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용서의 포옹 속으로 들어왔지만, 큰 아들은 뒤에 서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 자신의 분노를 수그리지 못하고 아울러 아버지의 어루만져주심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자(작은아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큰 아들)이 못마땅해 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함께 해야 함을 말씀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항구한 의인들에 대해서도 기뻐하시지만(큰아들) 죄인의 회개를 더욱 기뻐하시는 아버지 사랑의 신비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탕자이다. 나를 하느님의 자녀요, 내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라고 불러주는 가정을 나는 왜 자꾸 떠나려고만 하는가? 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면서 “나는 당신이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라는 소리를 하는가? 탕자의 이 말은 아담이 저지른 최초의 반역의 재현이었다. 그 반역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같이 생명 나무를 만질 수 없는,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났고, 또한 그 반역 때문에 내 자신은 “먼 나라”로 쫓겨나게 되었다.“



모로코나 인도 터키 등지에서 헨리뉴엔 신부님께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네 마을에서 이제까지 누군가가 그와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때렸을 것입니다.”

“왜지요?”

“그의 요구는 한 마디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이니까요.”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한 후에도 그가 살아있는 한 그 수익을 누릴 권리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아들은 그의 요구 속에 암시된 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보다 엄밀히 말해서 자기에게 처분할 권리가 없는 그 재산을 처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구사항의 저변에는 “아버지! 저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아들의 떠남은 바로 자신이 태어나고 양육 받은 가정에 대한 냉혹한 거부 반응입니다. 나아가서 자신이 소속된 보다 큰 공동체가 애지중지하게 지켜오던 가장 소중한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제 것을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다”라는 것은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단순한 청년의 야심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먼 지방은 가정에서 거룩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들을 경시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그리고 집을 떠난다는 것은 마치 내가 아직 집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찾기 위해 멀리 나가서 찾아야만 한다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본인 스스로 떠나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완벽한 착각에 철저히 사로잡힌 채 떠나가는 것입니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추구는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먼 나라(아버지의 품을 떠난, 고향을 떠난, 신앙을 저버린)”에서 궁지에 처할 때, 바로 그 곳에서부터 구원의 외침이 일어나게 됩니다. “굶어 죽게 되었구나. 돌아가야지.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해야지…”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유흥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작은 아들을 더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 고장에 들이닥친 흉년이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돈이 떨어져 버린 그에게 남아있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비참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돼지는 부정을 탄 짐승이기 때문에 그것을 친다는 것은 유다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받은 임금으로는 굶주림을 채울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짐승의 먹이이지만 건조되었을 때에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비참함은 회개의 시작을 불러왔습니다. 정욕에 불타 소경이 되었던 그가 지금 이성으로 명백히 사물의 가치를 보고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보냈던 생활과 지금까지 겪은 여러 가지 회상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습니다. 지금의 생활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일꾼들의 생활과도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품삯을 받았고, 먹을 양식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굶어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똥줄이 타야 기도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이 아들도 똥줄이 탔습니다. 그것은 그의 구원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께 지은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아직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청하려고 합니다. 살려만 달라고. 품꾼의 대우조차 지금의 그에게는 부러운 것입니다. “주의 집 뜰 안이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을 택하리이다”(시련84,10)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돌아가는 탕자

“아버지,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한편으로 그 작은 아들은 자신이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격을 상실했다는 의식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릴 자격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아들이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됩니다. 그 작은 아들의 귀향은 자신이 아들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재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비록 그가 거기에 따른 모든 자격을 상실했지만 말입니다.

자신을 “돼지만큼이라도 취급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자신에 있음을 알고 나서 그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죽음 대신 살 길을 택하도록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이 둘 모두 잃어버린 자녀들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던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탕자의 비유로 표현자하자면 그는 자신이 아들이라는 신분을 상징하는 검을 팔아치운 것과 같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자녀임을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습니다. 유다는 죽음을 택했지만, 베드로는 생명을 택했습니다. 작은아들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택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한 아들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없는 아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게 하였을 것입니다.

학수고대. 아버지는 매일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전의 전민동 성당 외벽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웬 기린을 그려놨냐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목을 기린의 목처럼 그렇게 길게 그려놓았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그런데 정말 기린처럼 보이긴 합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죄를 지은 아들, 용서하는 아버지.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아버지.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는 아버지. 제일 좋은 옷은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에게 본래의 권리와 지위를 다시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일 좋은 옷”은 위대한 인물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넓은 값진 옷을 의미합니다. 가락지는 특별한 권위와 명예의 표시입니다. 신은 자유인의 표시입니다. 종들은 맨발이었습니다.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기쁨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 나누기를 하는데 어느 형제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송아지가 되어 보았습니다. 송아지는 탕자 덕분에 죽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이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잔치를 위해 내가 희생되는 것은 좋지만 시간이 지나고 탕자의 배에 기름기가 끼면 또 나갈텐데….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어야 하는가…어차피 또 나갈 사람일텐데…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느님께서는…,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면 큰 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종들이 달려가서 큰아들을 모셔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유가 주는 교훈 때문에 고의로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고, 아버지의 기쁜 마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만큼 큰 것 이었다는  것을 드러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하인은 큰 아들에게 전후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 했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큰 아들

큰 아들이 분노에 휩싸여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이 말 속에는 이 사람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자존심은 아버지의 기쁨에 의해서 여지없이 고통스런 상처를 입었고, 자기 자신의 분노 때문에 돌아온 탕자를 자기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이 아들” 이라는 말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과도 거리감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더 이상 동생이란 없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도 없습니다. 두 사람 다 그에게는 낯선 이방인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생을 멸시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또한 자기 아버지를 두려움을 가지고 올려다보고 있다. 종의 주인으로…큰아들은 자기 집에서 타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아버지(하느님)는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으셔. 철없이 탈선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온 회개하는 동생을 더 사랑하시니 말야. 아버지는 집을 떠난 적이 한번도 없는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으셨어. 아버지는 나를 이상하게 보고 계셔. 나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그분이 나에게 주시리라는 기대는 다 접어 두었어….”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을뿐더러 큰 아들의 행동을 나쁘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평가를 다 접어두고 그 아버지는 자신과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단도직입적으로 강조하면서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말씀할 뿐입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포는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할 것이라는 일체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작은 아들의 극적인 귀향을 기뻐한다고 해서 큰 아들을 덜 사랑한다거나 덜 인정한다거나 덜 좋아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둘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인 인생 여정을 따라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나는 작은 아들이든 큰 아들이든 간에 나에게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귀향하는 자녀에게 단 한 마디의 질문도 없이 또 그에게서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은 채 환영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길은 영원한 축복이며, 아버지의 품에 기댄 아들은 영원한 평화입니다. 나 또한 그렇게 다가오는 형제들을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1. 탕자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아버지와 두 아들 중 자신이 해당되는 대상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2.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 입니다. 그분께 용서를 청하면서 나는 다른 이들도 용서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받아들여야만 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한번 멀어지면 더 멀어지는 듯합니다. 혹시 내가 받아들여야만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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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5,11-32 :탕자의 귀향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탕자의 귀향

    1. 말씀읽기:루카 15,11-32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죄인 하나의 회개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께서는 전하시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와 잃었던 은전의 비유와 그리고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를 드십니다.

     이 이야기는 두 형제를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를 지닌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선하시고, 두 아들을 사랑하시며,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달려 나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두  사람(회개한 죄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한 식탁에 앉아서 자신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작은 아들은 스스로 용서의 포옹 속으로 들어왔지만, 큰 아들은 뒤에 서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 자신의 분노를 수그리지 못하고 아울러 아버지의 어루만져주심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자(작은아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큰 아들)이 못마땅해 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함께 해야 함을 말씀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항구한 의인들에 대해서도 기뻐하시지만(큰아들) 죄인의 회개를 더욱 기뻐하시는 아버지 사랑의 신비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탕자이다. 나를 하느님의 자녀요, 내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라고 불러주는 가정을 나는 왜 자꾸 떠나려고만 하는가? 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면서 “나는 당신이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라는 소리를 하는가? 탕자의 이 말은 아담이 저지른 최초의 반역의 재현이었다. 그 반역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같이 생명 나무를 만질 수 없는,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났고, 또한 그 반역 때문에 내 자신은 “먼 나라”로 쫓겨나게 되었다.“


    모로코나 인도 터키 등지에서 헨리뉴엔 신부님께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네 마을에서 이제까지 누군가가 그와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어느 누군가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때렸을 것입니다.”

    “왜지요?”

    “그의 요구는 한 마디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그런 뜻이니까요.”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한 후에도 그가 살아있는 한 그 수익을 누릴 권리를 여전히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아들은 그의 요구 속에 암시된 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보다 엄밀히 말해서 자기에게 처분할 권리가 없는 그 재산을 처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구사항의 저변에는 “아버지! 저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아들의 떠남은 바로 자신이 태어나고 양육 받은 가정에 대한 냉혹한 거부 반응입니다. 나아가서 자신이 소속된 보다 큰 공동체가 애지중지하게 지켜오던 가장 소중한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제 것을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다”라는 것은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단순한 청년의 야심 그 이상의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먼 지방은 가정에서 거룩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들을 경시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그리고 집을 떠난다는 것은 마치 내가 아직 집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찾기 위해 멀리 나가서 찾아야만 한다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본인 스스로 떠나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완벽한 착각에 철저히 사로잡힌 채 떠나가는 것입니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추구는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먼 나라(아버지의 품을 떠난, 고향을 떠난, 신앙을 저버린)”에서 궁지에 처할 때, 바로 그 곳에서부터 구원의 외침이 일어나게 됩니다. “굶어 죽게 되었구나. 돌아가야지.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해야지…”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유흥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작은 아들을 더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 고장에 들이닥친 흉년이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돈이 떨어져 버린 그에게 남아있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비참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돼지는 부정을 탄 짐승이기 때문에 그것을 친다는 것은 유다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받은 임금으로는 굶주림을 채울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짐승의 먹이이지만 건조되었을 때에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비참함은 회개의 시작을 불러왔습니다. 정욕에 불타 소경이 되었던 그가 지금 이성으로 명백히 사물의 가치를 보고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보냈던 생활과 지금까지 겪은 여러 가지 회상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습니다. 지금의 생활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일꾼들의 생활과도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품삯을 받았고, 먹을 양식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굶어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똥줄이 타야 기도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이 아들도 똥줄이 탔습니다. 그것은 그의 구원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께 지은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아직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품꾼으로라도 써 달라고 청하려고 합니다. 살려만 달라고. 품꾼의 대우조차 지금의 그에게는 부러운 것입니다. “주의 집 뜰 안이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을 택하리이다”(시련84,10)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돌아가는 탕자

    “아버지,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한편으로 그 작은 아들은 자신이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격을 상실했다는 의식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릴 자격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아들이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됩니다. 그 작은 아들의 귀향은 자신이 아들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재주장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비록 그가 거기에 따른 모든 자격을 상실했지만 말입니다.

    자신을 “돼지만큼이라도 취급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자신에 있음을 알고 나서 그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죽음 대신 살 길을 택하도록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이 둘 모두 잃어버린 자녀들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던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탕자의 비유로 표현자하자면 그는 자신이 아들이라는 신분을 상징하는 검을 팔아치운 것과 같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절망의 와중에서도 자녀임을 주장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습니다. 유다는 죽음을 택했지만, 베드로는 생명을 택했습니다. 작은아들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택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한 아들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없는 아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게 하였을 것입니다.

    학수고대. 아버지는 매일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전의 전민동 성당 외벽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부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웬 기린을 그려놨냐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목을 기린의 목처럼 그렇게 길게 그려놓았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그런데 정말 기린처럼 보이긴 합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죄를 지은 아들, 용서하는 아버지.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아버지.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는 아버지. 제일 좋은 옷은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에게 본래의 권리와 지위를 다시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일 좋은 옷”은 위대한 인물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넓은 값진 옷을 의미합니다. 가락지는 특별한 권위와 명예의 표시입니다. 신은 자유인의 표시입니다. 종들은 맨발이었습니다.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기쁨의 잔치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 나누기를 하는데 어느 형제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송아지가 되어 보았습니다. 송아지는 탕자 덕분에 죽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이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잔치를 위해 내가 희생되는 것은 좋지만 시간이 지나고 탕자의 배에 기름기가 끼면 또 나갈텐데….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어야 하는가…어차피 또 나갈 사람일텐데…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느님께서는…,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면 큰 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종들이 달려가서 큰아들을 모셔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유가 주는 교훈 때문에 고의로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고, 아버지의 기쁜 마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만큼 큰 것 이었다는  것을 드러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하인은 큰 아들에게 전후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 했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큰 아들

    큰 아들이 분노에 휩싸여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이 말 속에는 이 사람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자존심은 아버지의 기쁨에 의해서 여지없이 고통스런 상처를 입었고, 자기 자신의 분노 때문에 돌아온 탕자를 자기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이 아들” 이라는 말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과도 거리감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더 이상 동생이란 없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도 없습니다. 두 사람 다 그에게는 낯선 이방인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생을 멸시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또한 자기 아버지를 두려움을 가지고 올려다보고 있다. 종의 주인으로…큰아들은 자기 집에서 타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아버지(하느님)는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으셔. 철없이 탈선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온 회개하는 동생을 더 사랑하시니 말야. 아버지는 집을 떠난 적이 한번도 없는 나에게는 관심조차 없으셨어. 아버지는 나를 이상하게 보고 계셔. 나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그분이 나에게 주시리라는 기대는 다 접어 두었어….”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변명하지도 않을뿐더러 큰 아들의 행동을 나쁘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평가를 다 접어두고 그 아버지는 자신과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단도직입적으로 강조하면서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말씀할 뿐입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포는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할 것이라는 일체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작은 아들의 극적인 귀향을 기뻐한다고 해서 큰 아들을 덜 사랑한다거나 덜 인정한다거나 덜 좋아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둘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인 인생 여정을 따라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나는 작은 아들이든 큰 아들이든 간에 나에게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귀향하는 자녀에게 단 한 마디의 질문도 없이 또 그에게서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은 채 환영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길은 영원한 축복이며, 아버지의 품에 기댄 아들은 영원한 평화입니다. 나 또한 그렇게 다가오는 형제들을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1. 탕자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아버지와 두 아들 중 자신이 해당되는 대상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2.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 입니다. 그분께 용서를 청하면서 나는 다른 이들도 용서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받아들여야만 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한번 멀어지면 더 멀어지는 듯합니다. 혹시 내가 받아들여야만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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