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1. 안식일의 의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한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탈출 20, 8-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공휴일 정도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어 주신 계약과 결부되어 있었다. 안식일은 특별한 모양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날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것은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해서 일곱째 날 거룩히 지내라고 강조하지만 신명기 법전에서 안식일을 강조하는 내용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 “너희 주인들이 쉬어야지 종들도 쉬고, 나귀도 쉴 수 있다.” 이것은 억눌린 사람들의 휴식을 위해서라도 안식일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회정의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 안식일은 인도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단순히 사법적인 성격을 초월하여 인본주의적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극단적으로 지키기 까지 하였다. BC 171년, 안티오쿠스 4세는 안식일을 금지시키고, 토라의 소지를 금지시켰으며 안식일을 지낼 경우에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할례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였으며, 제우스 신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봉헌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때에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강요하던 시리아 병사를 마타디아 노사제가 죽이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166년에 마타디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망치’라는 뜻)가 자유를 위한 전쟁의 지휘권을 가지고 투쟁을 한다. 이 투쟁에 즉시 참여한 사람도 많지만 회의적 자세를 가지고 회피한 계층이 더 많다. 회피한 계층 중에는 하시딤(경건주의자)집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종교자유는 원했지만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주저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동굴에 숨어 있던 수많은 하시딤을 찾아내서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식일이었기에 이들은 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안식일 규정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쁨에 넘쳐 하느님 안에서 쉬는 날이라는 개념에서 점차 의무적인 날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 복음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부자리를 가지고 옮겨다니는 것조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행동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안식일을 예수님께서 무시하였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게 된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셨더라도 박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삐들의 의견을 보면 보통 죽을 위험에 처해진 사람이라면 안식일에라도 치유할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음날로 미루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38년을 기다려온 사람이라면 하루쯤 더 기다렸다가 치유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고 시비를 건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다르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니..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명백하게 취소하지 않으셨다. 즉 안식일에 자주 회당에 가셔서 복음을 설교할 기회를 가지셨다. 그러나 그분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형식적 엄격주의를 배격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리고 애덕의 의무가 휴식을 물리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권능을 당신에게 보류하셨다. 즉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이 때문에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박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신다. 아버지 하느님꼐서는 창조 사업을 완성하시고 한번 휴식에 들어가셨지만, 당신을 다스리시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계속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좋을 일을 하시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켜나갔다. 승천 후에도 안식일에 모여 유대인 가운데서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간의 첫날이 주님의 날인 이상, 곧 그것이 교회의 예배의 날이 된다.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안식일에 행하던 하느님 찬미와 자선 같은 일들이 주님의 날로 옮겨졌다. 새로운 관점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옛 안식일은 구약의 다른 많은 관습들처럼 상징적 의미를 띠게 된다. 사람들은 휴식 행위로써 7일째 날에 하느님이 쉬신 것을 기념했으나,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휴식에 들어가셨고, 우리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안식처에 들어갈 약속을 보장받게 되었다(히브 4,1-11). 진정한 안식일은 일을 하시고 쉬시는 하느님을 닮아, 사람들이 자기 일을 멈추고 쉬는 때에 찾아올 것이다.



불신자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인 특성을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고발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당신은 결코 아버지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행동하시지 않음과 당신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조화를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본 그대로를 행하실 뿐이다. 사실 당신의 존재 이유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사업을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라삐들의 가르침에 있어서 안식일에 아버지께서 행하는 두 번째 활동은 심판하시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아버지께로부터 그 일을 행하도록 위임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심판관이시다. 그러나 심판관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여 벌이나 상을 주시는 의미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심판관이시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건너가게 하고, 듣고도 믿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스스로 영원한 단죄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이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는 심판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서부터 생명으로 이미 옮겨간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부활하는 날에, 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네 행위의 결과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가 아버지 하느님의 행위이니 그것이 그를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 아비지 하느님과 얼마만큼 하나인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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