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파 [한] ∼派 [라] Hussitae [영] Hussites

15세기초 후스(Jan Huss, 1369∼1415)의 추종자들이 남부 보헤미아(현 체코) 지방에서 결성한 한 분파로 유명한 후스전쟁(1420∼1431년)을 일으켰다.

후스파의 정신적인 지주(支柱)인 후스는 보히미아에서 태어나 프라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1400년에 서품되었으며, 1402년부터는 프라그대학장으로서 강단에 섰다. 그는 영국의 종교개혁자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고, 프라하의 베들레헴 소성당의 설교가로 위클리프의 사상을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프라하의 대주교와 충돌하게 되었고, 급기야 요한 23세로부터 파문까지 당하게 된다(1412년). 그 뒤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심리를 받았고, 공의회는 그의 명제 30개를 이단으로 배척함과 동시에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415년 화형(火刑)을 받고 죽었다.

≪교회론≫(De Ecclesia)을 비롯한 그의 여러 저서들은 후스파의 주요한 이론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것은 소위 ‘프라그 4개조’(4 Prager Stuke) 속에 규정되어 있는데, ① 하느님 말씀의 자유로운 설교, ② 영성체 때 빵과 포도주 등 2개의 형(兩形)을 함께 배령, ③ 성직자의 무소유적(無所有的) 생활, ④ 대죄를 범한 사람의 처벌 등이 그것이다. 이중 ②는 양형론(兩形論, utraqism)이라 불리며, 다양한 후스파를 일치시킨 중요한 논제의 하나였기 때문에 후스파를 양형론파(utraquistae)라고도 한다. 후스파는 후스가 사형당한 뒤 전쟁을 일으켜 약 50년 동안 보헤미아지방을 휩쓸었다. 여기에 대해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그 밖의 이단자에 대하여>란 칙서를 발표하고 십자군을 조직하여 후스파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1433년 프라하 계약(compactara)에 의해 중단되었다. 이 계약은 후스파에게 빵과 포도주 양형 모두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선언하는 조건으로 양형의 영성체를 허가하는 것이 내용의 골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양형의 성체를 모두 배령하여야 구원될 수 있다고 하는 후스파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철회하게 하는 것이었다. 후스파의 일부는 이 계약에 만족하였지만 타보르파(Taborites)는 이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전투를 계속하였지만 1433년의 리판(Lipan)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프라하계약은 1436년 반포되었는데, 그 후로도 분쟁은 계속되었고, 때로는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한 예도 허다하였기 때문에 교황 비오 2세는 양형론자의 의식(儀式)을 완전히 폐지시켰다. 그러나 불화의 씨앗은 계속 남아 16세기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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