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학생운동 [한] ~學生運動 [영] Catholic Student Movement

가톨릭 교회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보편적 성사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강조하였다. 따라서 어떠한 특수한 사람이나 특수한 계층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며 모든 계층이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구원의 역군으로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봉사자로서 젊음과 지성의 은혜를 받고 있는 학생들이 책임은 그 누구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잇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 학생운동은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지 운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 학생운동의 역사를 보면, 각국이 제 나름대로의 특수한 여건 속에서 독자적으로 복음 전파에 앞장서 왔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 서구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본당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타종파가 우세한 국가에서는 교리의 전파 등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년 레지오 활동과 성가대 활동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의 활동 등이다. 특히 비가톨릭 국가에서는 학생들이 봉사활동이 없이는 선교의 실효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은 교회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귐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서로의 인간적 사귐이 있어야 하므로 학생운동단체는 학생 상호간의 인간적 사귐을 촉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더구나 현대세계가 물질만능주의와 금전만능주의에 흐르고 있을 때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대화를 통해서 인식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각국의 가톨릭 학생운동은 교구별 국가별로 연합체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교회는 그 지역 그 국가에서 구체적으로 토착화해야 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어떤 사회에서나 엘리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진보적 세력의 핵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때때로 보수적 세력에 의해서 위험시되거나 비난받은 일도 있었다. 각 국가별 연합회가 모든 나라에서 조직되자 세계적 국가적 규모의 단체로 조직화되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미 2차대전 이후부터 국제적 규모의 가톨릭 학생운동이 시작되었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교회일치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교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팍스(Pax)의 사상은 가톨릭 학생운동의 근본적 이념이 되었다. 팍스의 사상은 세계평화와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여 국적 · 인종 · 국경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랑과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시아 · 아프리카 등 후진국을 중심으로 부정(不正)하고 불공정한 사회체제에 대한 예언적 비판, 국가의 독립을 위한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있다. 아시아의 경우 이미 각국의 대표들로써 연합회(P.A.A.)가 조직되어 3년마다 총회를 개최하면서 아시아 각국의 공통된 관심사를 분석 검토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를 기초로 하여 각 나라에서 가톨릭 학생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과 소외당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쏟고 있다.

가톨릭 학생운동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학생운동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즉 가톨릭신자 학생들만의 고립된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타종파나 비그리스도교 학생운동과 제휴하면서 비인간적 체제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학생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사회참여는 어디까지나 교회적인 방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운동방법과는 다른 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학생은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특히 대학은 자유와 권리와 정의의 전당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톨릭 학생운동은 대학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 보여야 하며 때로는 수난과 박해가 있다 하더라고 교회?대학?세상안에서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초기 가톨릭 학생운동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본당 안에서 주일학교 교사화 합창단 및 청년 레지오운동 등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각 대학에서 대학단위의 가톨릭 학생회가 조직되어 상호간의 친목과 신앙의 심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톨릭 학생운동이 연합체로서 시작한 것은 1954년 가톨릭 학생연합회가 창립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때는 교회 내의 보조협의체로서 레지오 중심의 청년 활동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그 활동도 심신 위주였고 그 조직도 지극히 폐쇄적이어서 개인구령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참여나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1955년 전국대회의 주제가 자기 성화였고, 1956년은 학생사도직, 1957년은 평신도사도직, 1959년의 주제는 조직과 재정이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1960년의 4.19혁명을 계기로 가톨릭 학생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이 무렵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교회상이 정립되고 교회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됨으로써 교회의 사회참여의 필요성이 지적되어 가톨릭 학생운동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전파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1961년의 전국대회의 주제가 교회와 공산주의였고, 1962년의 주제는 사회정의와 산아제한이었으며, 1963년의 주제는 요한 23게의 회착인 지상의 평화였다. 또 1964년의 주제가 에큐메니컬운동이었다는 것은 바로 한국 가톨릭 학생운동이 교회의 현대화와 쇄신에 보조를 맞추어 발전해 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제들을 연구하고 탐구한다는 것은 과거의 가톨릭 교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조직면에서도 필리핀에서 도입된 ‘셀 테크닉’(cell technic)이 도입되어 새로운 이념에 따라 과학적인 활동방식이 보급되었다. ‘셀’이란 어떠한 단체나 공동체가 소그룹으로 나누어져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거기에서 어떠한 표지를 발견하고 그 다음에 복음의 빛에 따라 판단하며 마지막으로 행동에 롬기는 활동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발전과정 속에서 한국의 가톨릭 학생운동은 현실적 정치상황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육화(肉化)하느냐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드디어 1967년의 전국대회에서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항거함으로써 이 세상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1969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 가톨릭학생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한 맥노튼(McNaughton,羅吉) 주교(당시 가톨릭 학생연합회 총재주교)는 지난 수년 동안 아시아 대학생들은 대학개혁과 사회적 개혁을 위하여 그 힘을 행사함으로써 사회개혁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 왔으나 그 활동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었으며, 그것은 교회지도자들이 학생운동의 중요성과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고 지적, 학생사목은 일반사목과는 다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당시 학생회 지도신부인 나상조(羅相朝) 신부도 가톨릭 학생운동이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 정도의 역할에 그쳐서는 안되고 대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70년의 전국대회는 제도화되고 권위주의에 빠진 오늘의 교회는 시대의 갈망에 응답할 숭 벗다고 결론짓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백안시되어 임원이 전원 교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70년 4월 16일에는 기독교학생연맹이 주최하는 ‘부활과 4월혁명’이라는 행사에 가톨릭 학생들이 참여하여 교파를 초월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구체적으로 역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행사에서 학생들은 오늘날 공포와 패배의식의 강요 속에 역사 앞에 방관자가 될 수 없음을 자각, 4월혁명의 참다운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고 우리 그리스도교 학생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역사인가를 말하기 전에 무엇이 악마의 역사인가를 먼저 고발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하느님의 계획 속에 기록될 4월의 영광은 조국의 번영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과정에서 더욱 찬란히 빛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우리들은 4월의 영광을 미래의 지평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동요도 없이 용기와 진리를 가지고 진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1970년의 11월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의 죽음을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자의 권익옹호에 앞장서게 하였으며 가톨릭 학생연합회도 ‘전태일의 추도식’을 거행함으로써 노동 3권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1971년의 전국대회는 역사적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장기계획을 작성하였고 학생기획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전국적 규모의 사업으로 ‘비인간화를 향한 도전’과 사회정화 캠페인을 개최하고 J.O.C.와 공동으로 ‘크리스천 사회 행동협의회’를 결성하여 사회정의 구현 세미나를 개최함과 동시에 개신교측과 합동으로 청계천에 살고 있는 100여 가구의 철거민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이주시키는 둥 구체적인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1년 12월에는 전국 학생지도 신부단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가톨릭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으며, 가톨릭 학생회 지도교수들의 모임도 있었다. 1972년 2월 대한 가톨릭학생 총연합회 회장단은 <연합회백서>를 제출하여 교회 당국의 간섭을 배격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학생사무국의 설치를 제안하면서 학생운동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 1972년 8월의 전국대회는 지도신부단의 단독결정인 전국기구 개편안에 대해 반대하고(10대 1) 총연합회 회장선거에서 대의원 상호간의 불일치가 드러나 총연합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국의 학원탄압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한편으로는 교회내의 보수적 경향과 연결되어 있다.

1973년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서울 대교구 가톨릭 학생회연합회가 ‘서울대 구속학생 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 무렵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 지주교 납치사건, 3.1명동기도회 사건, 전주교구의 7.6사태 등이 일어났다. 이에 호응하여 1975년 2월 과천 영보수녀원에서 3년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총연합회의 부활을 선언하고 혼탁한 사회를 화해와 쇄신으로 이끌고 부정과 불의를 극복할 것을 다짐하였고 그 후 계속적으로 민주회복과 인권운동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사정과 교회지도자의 학생운동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아직도 가톨릭 학생운동은 그 방향을 정립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하루속히 젊은 학생들이 모임인 가톨릭학생 연합회가 활성화되어 대학이나 교회나 사회 안에서 정의와 진리의 기수가 되고 사랑과 일치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며, 젊은 학생들이 교회를 외면하거나 무기력한 집단이 되지않도록 고무해야 할 것이다. (韓庸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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