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신경에서의 위치
이 신앙고백의 핵심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라기 보다는 하느님 말씀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육화’의 신비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의 전반에 흐르는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 하느님의 육화된 말씀으로 이뤄지는 세상의 구원을 연결해 주는 고리의 역할이 바로 이 셋째 조항이다.
1.1. 성령의 역할
이 조항의 전반부에는 성령의 역할을 표현함으로써,
1)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 개입의 현재를 말하고 있으며, 2)나자렛 예수의 출생과 근원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3)새 세상의 창조 – 구원으로서 : 새로운 창조의 힘은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힘이며 그것은 성령의 힘이다, 4)세상의 현실을 뛰어넘는 사건은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으로서만이 가능하며, 5) 육화의 주도권은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1.2. 잉태되시고
사도신경에만 표현되는 ‘잉태되시고’는 루가 복음의 주의 탄생 예고의 영향으로 다른 신경보다 더 직접 요셉의 역할을 배제하고 있는 표현이다. 즉 육화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절대 자유로 이루어졌으며 예수의 탄생은 사람의 性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기적의 임신이라는 것이다(하느님의 말씀의 힘은 곧 창조의 힘)
2. 동정녀 마리아께로부터 나시고
2.1. 마리아 공경의 小史
신약성서적 마리아론의 빈약함은 다채로운 노고의 산물인 금세기 중반부의 흘러 넘치는 신학 작품들과는 두드러지게 대조적이다. 그러나 성서에서의 이와 같이 얼마 안되는 시사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어떤 다른 분야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 마리아론에서는 증가 확대되었다.1)
2.1.1. 교부시대
신약성서의 예수님 모친에 대한 새로운 상념들이 심화되어가는 시대이다. 이교도인들과의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되어감. 교부들은 인과율적 – 논리적 결론을 뛰어넘어 신학적 실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 마리아와 교회와의 유비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교부들은 성서를 관찰하면서부터 마리아상이 지닌 보다 넓고 주요한 면모의 명증성을 즉시 발견해내었다. 바울로는 로마서에서 아담과 그기스도 사이에 평행선을 그은 바 있다(로마 5, 12-21). 생명을 출산해야 할 원조는 죽음의 창시자가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구해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아담의 경우에는 한 여인 즉 살아있는 자들의 어머니인 하와가 연루되어 있고, 신약성서에는 동정녀 마리아가 역시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보유했다고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2) 아담과 그리스도의 반명제적 평행선은, 초대 그리스도됴적 사상가들로 하여금 하와와 마리아의 관계를 평행선으로 확대하게 한 계기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하와와 교회 관계를 관찰하도록 이끈 계기가 되게 하였다.3) 하와가 첫째 아담의 반려자이듯이, 교회는 둘째 아담의 신부, 반려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위한 충분한 근거는 성서가 제공하였다(에페 5, 25-32참조).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함으로써, 인류의 원초 역사에까지 이르는 과거에로의 전망이나, 교회의 현재에로의 전망이 열릴 뿐만 아니라, 하와로 말미암아 야기된 비구원 상태를 재건하는 여인으로서의 마리아의 구원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교회를 연관시켜서 바라보는 것은 논리정연한 듯이 보였던 것이다.4)
3세기는 그리스도의 모친에 대한 지속적인 동정성의 교리를 형성함으로써 마리아론에 기여했으며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속에 이미 증언되고 있다. 마태오와 루가복음은 마리아가 인간인 남편이 없이 예수를 출산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4세기초부터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란 칭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 칭호는 마리아론적 관심에서부터가 아니고,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 관심에서부터 부여된 것이다. 첫 5세기 동안에 가장 많이 논란되었던 신학적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하는 물음이었다. 신학은 오랫동안 매우 고심하던 끝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둘째 위격의 위격적 일치로써 합일되었다는 정식을 결정적으로 형성하기에 이르며 이 과정에서 마리아에 관한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마리아가 참으로 어머니라면, 그녀와 아들 사이에는 인격적 관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어떤 어머니든 어머니라면 전인으로서의 어머니인 것이지, 육신마의 어머니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바로 그분의 어머니이므로 하느님의 모친으로 지칭되어야 하는 것이다.
5세기까지 교부들은 마리아가 일련의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띠노의 저서를 통해서 마리아의 전적인 聖性과 무죄성에 대한 명제가 일차적으로 서방교회에서 관철되고, 오랜 발전을 거친 끝에 동방교회에서도 관철되기에 이른다.
4세기말경에 그리스도 모친의 임종에 관한 신학적 사유가 처음으로 전개되었다. 8월 15일이 예수살렘에서는 ‘하느님 모친의 날’이었는데 이는 벌써 5세기에 이루어졌다. 6세기에 이 축일을 ‘하느님 모친의 귀향’ 기념일로 바꿔 불렀다. 교황 세르지오1세는 이 축일을 서방교회의 축일표에 포함시키고 그 이후 동방교회나 서방교회를 막론하고 마리아 축일이면 강론가들은 거의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았노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5)
2.1.2. 중세기
사람들은 구원사업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점점 더 많은 주목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모친이 처지에서부터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마리아의 인격과 생애에 대하여 더 많이 알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리아의 특별한 기능과 연결되어 있는 즉 마리아가 입은 은총의 탁월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자기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추구하던 중세인들은 마리아를 전구자, 모친 그리고 조력자로 대하였다. 따라서 마리아 신심이 광범위하게 일깨워졌다.
수많은 중세기 저자들은 성금요일부터 부활 아침까지는 마리아 홀로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홀로 교회였다고 말한다.6) 이러한 가운데서 끌래보의 베르나르도로부터 처음으로 구원사업 안에서의 마리아의 중재성의 생각이 게발되었다. 마리아는 교회의 여러 지체를 위해 하느님께 그치지 않고 전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은총을 전해주는 수도와 같다는 것이다.
2.1.3. 마리아와 종교개혁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교호를 위해서 전구를 한다 할지라도 죽음을 물리쳐야 하고, 사탄의 어마어마한 힘과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다. 마리아가 이를 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마리아는 온갖 최고의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기는 하나 그리스도와 똑같이 간주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신앙과 겸손의 모범으 따를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마리아에 대한 과장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서야 할 자리에 마리아가 대신 들어서게 된다.”(Confessio Augustana)
2.1.4. 근세
마리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거리감은 가톨릭 신자들가 쟁론을 벌이는 가운데 점점 더 반 마리아적 입장으로 경직되어 갔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측에서는 마리아 신심의 엄청난 확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 신심운동은 특히 종교개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던 몇몇 나라에서 더욱 강렬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금세기에 들어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비로소 마리아 운동이라고 부를 만한 마리아론적 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구원사업에서의 마리아 중재성, 마리아의 영적 모성, 그리고 공동 구속자성등 세 가지 주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대표적으로 하느님께 ‘예’를 발함으로써 이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로써 본질절으로는 아니더라도 통합적으로 구속자를 위해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는 중재자이며, 공동 구속자라고 지칭될 수 있다.
2.1.5. 2차 바티칸 공의회
과거의 이상적인 과장 행위에서 벗어나 보다 성서적이고 교부학적 주제, 즉 마리아의 찬미 자체가 아니라 마리아의 구세적 기능을 밝히려 하였다.
“과연 마리아는 당신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소명을 받아 사람들을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일에 협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셨다”(교회헌장 65항)
2.2. 마리아 공경의 타당성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가 이해한 바를 전수받고, 교회의 성서 이해를 주장하며 그와 함께 한다. 또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 관해서, 가장 높고 거룩한 삼위이고 표현할 수 없이 신비스럽고 혹은 우리의 구원과 영원을 부여하는 하느님에 관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한 고백에는 분명 인간에 대한 부분이 있다. 예를들면 신경의 부수적인 부분에 단순히 사람이 된 말씀의 역사안에서 신앙에 대한 인류의 배반을 표상하기 때문에 나오는 인간 존재들이 있는 것처럼, 또한 신앙을 표상하기 위해 나오는 인물들도 있다.7)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유일한 신앙이며 신학이지만 사실 인간에 대한 신학은 있다.8) 인간학이 아니고 신학안에 포함된 인간, 즉 인간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함으로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현양하는 그런 것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학, 인간 자체에 대하여 하나인 영원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가장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시켜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신앙고백이 있다. 인간에 대해 말함이 없이 하느님만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에 깊숙히 개입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고 – 더욱이 인간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기에 인간은 신앙이 강론해야 하고 신학이 설명하는 내용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은 필연적으로, 단순히 부수적으로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마리아, 주님의 어머니, 복된 동정 어머니에 관한 신앙의 가르침이 가능한 이유이다.
2.3.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서 마리아
완전한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면, 마리아는 자기 정신의 신앙과 자기의 복된 태 안에,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즉 자기 존재의 모든 힘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을 받아들인 까닭에 완전한 그리스도 신자요 그리스도다운 모범적인 인간 존재이다. 완전한 그리스도교가 구세사 안에서의 외적 사명과 개인 생활 사이의 완전한 호응이라면 그 호응은 마리아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마리아는 영원한 아버지의 육화된 말씀을 가시적으로 또한 감촉할 수 있게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구원의 외적인 가시적 역사 안에 단순한 인간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의미 깊고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시에 마리아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자기의 유일한 임무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의 전체적 신앙의 동의로 자기 개인 생활 안에서 충만히 받아들이고 실현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타인들의 구원을 위하는 사심 없는 봉사 정신으로 자기 자신의 은총의 영향을 빛내는 것일진대, 마리아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의미하는 바의 가장 완전한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 즉 그녀가 신앙의 동의에 의하여 그리고 자기 신적 모성의 물리적 실재 안에서 수태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구원받는 자들의 공동체 안의 인간 존재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자이고 완전한 모든 사람의 대표이고 교회와 은총과 구속과 하느님의 구원의 의미를 완전히 나타내 주는 전형이요 표상이다.
2.4.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 교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9)
1)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머물렀다.
2)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다.
3)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
4)마리아는 죄없는 삶을 영위하였다.
5)마리아는 사망 후 ‘승천’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기초와의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이므로 여러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그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11항).
3.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탄생을 보통 인간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동정녀로서 마리아의 위치는 오늘날 점점 더 가톨릭 교회안에서 조차 논란이 되고 있다. 사도신경의 이 귀절은 여러 신학자들, 특히 에밀 브룬너(1889-1966)의 견해에 의하면 단지 상징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교회 신조를 고백하는 신학자-칼 바르트(1886-1968)-들도 적지 않다.
3.1. 제기된 문제들
3.1.1.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동정녀 출산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의 관심사는 자연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하나의 기적 설화이다.
3.1.2. ‘종교학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세계의 영향으로 성서가 기적적 출산 관념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하였을 가능성이 있다(Ex: 구약 – 이사악, 삼손, 사무엘 ; 신약 – 세자요한). 즉 예수 탄생의 경우에 성서의 다른 예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절대적이고도 강력하게 하느님이 개입하심을 말하는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신화론적 진술이다.
3.1.3.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를 제외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동정녀의 출산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 점이 동정녀의 출산과 이를 증언하는 마태오와 루가의 보도를 의심쩍게 만든다.
3.2. 반대논증
3.2.1. 자연과학적 반론
동정녀 출산에 대한 신조는 자연 과학적 지반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조는 세계가 ‘인격적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전제하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자연 발생 안에 삽입시킬 수 있다. 창조개념으로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적 입장에서의 정당한 반론이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3.2.2. 종교학적 반론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외없이 ‘개종자’들이었고 당연히 이교의 입장과 인습을 이어 받았으며 또 그리스도교화 할 수 있었던 부분은 그리스도교화 하였다(Ex : 크리스마스). 이는 다른 비슷한 일에도 해당되며 따라서 이교도들의 여신들이 구세주의 모친과 함께 제시되었다. 그러나 ‘유비’가 계보학은 아니며 외현형식이 유사하다고 해서 원천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수는 없다. 관건이 되는 것은 ‘기적적인 탄생’이지 ‘동정녀의 출산’이 아니다. 성서저자들이 그리스도를 신적 구세주로 선포하기 위해서 주의 기적적 탄생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을 신학적 진술 명제의 언어로써 표현한 것은 상상할 만 하다. 이들은 후대의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시대 사람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의 언어양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3.2.3. 주석학적 반론
마리아에 관한 성서적 증언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유년기 역사, 이를테면 동정녀 출산에 대한 신조의 원천이 문제가 된다. 성서저자들의 일차적 관심사가 史實이나 事實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는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보다 더욱 분명하게 된다. 성서저자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한 남자의 관여없이 발생한 예수 탄생 설화 ‘일차적으로 신학적 교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신학적 실재가 우리 앞에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설화가 ‘단지’ 하나의 신학적 교리일 따름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로도 드러나게 되는가 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물음이다.
3.3. 동정녀 출생의 의미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우리 인간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 육화는 다른 많은 사건처럼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임의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뒤바꾸는 의미를 지닌다. 육화는 역사를 종말론적 완성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이 육화를 ‘구세사적 사실’(救世史的 事實)이라고 표현한다. 육화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건이어서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동반하고 있다. 역사가 구원의 전표하에 흐르고 있는 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여 역사적 차원을 초월하게 되며 바로 이러한 가운데 구세사적 사실의 본연의 의미가 현시되는 것이다. 여기서 뜻하는 바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서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의 사실 즉 공문서 기록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또 기록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십자가 처형 사실은 역사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실임이 절대적으로 고수되어야 한다. 만일 나자렛 예수가 골고타 언덕에서 참으로 처형되지 않았더라면 십자가에서의 우리의 구속도 부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 사실이 신앙자체를 위해서는 그리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처형이란 그 당시 흔히 볼수 있었던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고 또 그 당시의 처형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던 까닭에 십자가 처형의 증인들은 아마도 대다수가 그와 같은 잔인한 사건 발생을 이미 여러 번 목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 형틀에 못박혔다고 해서 쉽사리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럴 수는 업었을 것이다. 따라서 범죄자로서 사형을 당한 이 사람이 하느님의 참 아들이고 세계의 구원자며 인간의 구원자였다는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다만 신앙의 눈으로만 그 죽음에 담겨있는 구원의 뜻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사적(史的)인 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이다.
동정녀로부터의 출생은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의심할 나위없이 구세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방금 행한 통찰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동정녀 출산에 대한 문제는 성서가 생물학적인 사건을 보도하려는가, 아니면 상징적 사건을 보도하려는가에로 환원될 수 없다. 이 양자택일은 실제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상징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기적에 불과하다. 이 기적은 보고 경탄할 수는 있으나, 이에서 구원신앙을 위한 동기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상징이 아무리 의미가 있다 해도 역사적 실재에 근거를 두지 않은 단순한 상징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한 농가의 외양간에 있는 이정표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동정녀로부터의 출생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된다. 자연과학도 종교과학도 그리고 역시-비판적 주석학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신학적 명상만이 오로지 이 문제를 해결한다. 신학적 명상은 사실성(史實性) 문제를 논함으로써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성 문제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이 문제의 중요성은 구원사건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본래의 질문의 중요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게 된 동정녀 출산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시작에 대한 하나의 표징이다. 동정녀 출산은 새로운 창조행위로서, 첫 번째 창조와 유대를 맺고 있다. 오로지 하느님으로 말미안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재로 현존하고 있다. 동정녀 출산의 신앙조항은 마리아론적 명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명제임이 분명해진다. 이 조항은 어머니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진술하기 전에 아드님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조항은 주변적 진리가 아니라 중심 위치에 자리하는 핵심적인 진리이다. 이 조항에서 우리는 구원의 차원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구원은 순천히 은총에서 오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이다. 성부가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의 태를 열어서 성자 그리시도 안에서 구현되도록 한 것이다.
이 조항은 또한 마리아론적 명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물론 구원이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기에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자유로운 신앙의 결단을 전제로 한다. 이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의 책임있는 수용자가 되는 것이다. 이 선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작품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 진정한 인간적 자세를 구세주의 모친이 되어야 할 한 여인이 완전한 상태로써 보여준다. 이 여인은 단순하게 믿고 조건없이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10)
현재의 가톨릭 교회에서 선포된 마리아에 관한 교의는 대부분이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신앙에 의한 것들이다. 교부들은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려 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면서 얻은 것이 마리아에 관한 교의이다. 이러한 마리아에 대한 신앙은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많은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현대에 와서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오스딩의 원죄론과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 신앙은 비본질적이지나 않은지, 또한 마리아 교의가 일차적인 명제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신학적 교리인지, 아니면 정통적인 가르침처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것만을 강조하든지…

1. 사도신경에서의 위치
이 신앙고백의 핵심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라기 보다는 하느님 말씀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육화’의 신비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의 전반에 흐르는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 하느님의 육화된 말씀으로 이뤄지는 세상의 구원을 연결해 주는 고리의 역할이 바로 이 셋째 조항이다.
1.1. 성령의 역할
이 조항의 전반부에는 성령의 역할을 표현함으로써,
1)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 개입의 현재를 말하고 있으며, 2)나자렛 예수의 출생과 근원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3)새 세상의 창조 – 구원으로서 : 새로운 창조의 힘은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힘이며 그것은 성령의 힘이다, 4)세상의 현실을 뛰어넘는 사건은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으로서만이 가능하며, 5) 육화의 주도권은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1.2. 잉태되시고
사도신경에만 표현되는 ‘잉태되시고’는 루가 복음의 주의 탄생 예고의 영향으로 다른 신경보다 더 직접 요셉의 역할을 배제하고 있는 표현이다. 즉 육화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절대 자유로 이루어졌으며 예수의 탄생은 사람의 性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기적의 임신이라는 것이다(하느님의 말씀의 힘은 곧 창조의 힘)
2. 동정녀 마리아께로부터 나시고
2.1. 마리아 공경의 小史
신약성서적 마리아론의 빈약함은 다채로운 노고의 산물인 금세기 중반부의 흘러 넘치는 신학 작품들과는 두드러지게 대조적이다. 그러나 성서에서의 이와 같이 얼마 안되는 시사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어떤 다른 분야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 마리아론에서는 증가 확대되었다.1)
2.1.1. 교부시대
신약성서의 예수님 모친에 대한 새로운 상념들이 심화되어가는 시대이다. 이교도인들과의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되어감. 교부들은 인과율적 – 논리적 결론을 뛰어넘어 신학적 실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 마리아와 교회와의 유비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교부들은 성서를 관찰하면서부터 마리아상이 지닌 보다 넓고 주요한 면모의 명증성을 즉시 발견해내었다. 바울로는 로마서에서 아담과 그기스도 사이에 평행선을 그은 바 있다(로마 5, 12-21). 생명을 출산해야 할 원조는 죽음의 창시자가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구해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아담의 경우에는 한 여인 즉 살아있는 자들의 어머니인 하와가 연루되어 있고, 신약성서에는 동정녀 마리아가 역시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보유했다고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2) 아담과 그리스도의 반명제적 평행선은, 초대 그리스도됴적 사상가들로 하여금 하와와 마리아의 관계를 평행선으로 확대하게 한 계기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하와와 교회 관계를 관찰하도록 이끈 계기가 되게 하였다.3) 하와가 첫째 아담의 반려자이듯이, 교회는 둘째 아담의 신부, 반려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위한 충분한 근거는 성서가 제공하였다(에페 5, 25-32참조).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함으로써, 인류의 원초 역사에까지 이르는 과거에로의 전망이나, 교회의 현재에로의 전망이 열릴 뿐만 아니라, 하와로 말미암아 야기된 비구원 상태를 재건하는 여인으로서의 마리아의 구원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교회를 연관시켜서 바라보는 것은 논리정연한 듯이 보였던 것이다.4)
3세기는 그리스도의 모친에 대한 지속적인 동정성의 교리를 형성함으로써 마리아론에 기여했으며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속에 이미 증언되고 있다. 마태오와 루가복음은 마리아가 인간인 남편이 없이 예수를 출산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4세기초부터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란 칭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 칭호는 마리아론적 관심에서부터가 아니고, 명백하게 그리스도론적 관심에서부터 부여된 것이다. 첫 5세기 동안에 가장 많이 논란되었던 신학적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하는 물음이었다. 신학은 오랫동안 매우 고심하던 끝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둘째 위격의 위격적 일치로써 합일되었다는 정식을 결정적으로 형성하기에 이르며 이 과정에서 마리아에 관한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그런데 마리아가 참으로 어머니라면, 그녀와 아들 사이에는 인격적 관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어떤 어머니든 어머니라면 전인으로서의 어머니인 것이지, 육신마의 어머니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바로 그분의 어머니이므로 하느님의 모친으로 지칭되어야 하는 것이다.
5세기까지 교부들은 마리아가 일련의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띠노의 저서를 통해서 마리아의 전적인 聖性과 무죄성에 대한 명제가 일차적으로 서방교회에서 관철되고, 오랜 발전을 거친 끝에 동방교회에서도 관철되기에 이른다.
4세기말경에 그리스도 모친의 임종에 관한 신학적 사유가 처음으로 전개되었다. 8월 15일이 예수살렘에서는 ‘하느님 모친의 날’이었는데 이는 벌써 5세기에 이루어졌다. 6세기에 이 축일을 ‘하느님 모친의 귀향’ 기념일로 바꿔 불렀다. 교황 세르지오1세는 이 축일을 서방교회의 축일표에 포함시키고 그 이후 동방교회나 서방교회를 막론하고 마리아 축일이면 강론가들은 거의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았노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5)
2.1.2. 중세기
사람들은 구원사업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점점 더 많은 주목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모친이 처지에서부터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사람들은 마리아의 인격과 생애에 대하여 더 많이 알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리아의 특별한 기능과 연결되어 있는 즉 마리아가 입은 은총의 탁월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자기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추구하던 중세인들은 마리아를 전구자, 모친 그리고 조력자로 대하였다. 따라서 마리아 신심이 광범위하게 일깨워졌다.
수많은 중세기 저자들은 성금요일부터 부활 아침까지는 마리아 홀로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홀로 교회였다고 말한다.6) 이러한 가운데서 끌래보의 베르나르도로부터 처음으로 구원사업 안에서의 마리아의 중재성의 생각이 게발되었다. 마리아는 교회의 여러 지체를 위해 하느님께 그치지 않고 전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은총을 전해주는 수도와 같다는 것이다.
2.1.3. 마리아와 종교개혁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교호를 위해서 전구를 한다 할지라도 죽음을 물리쳐야 하고, 사탄의 어마어마한 힘과 대항하여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이다. 마리아가 이를 행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마리아는 온갖 최고의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기는 하나 그리스도와 똑같이 간주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신앙과 겸손의 모범으 따를 것을 원하신다. 그런데 마리아에 대한 과장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서야 할 자리에 마리아가 대신 들어서게 된다.”(Confessio Augustana)
2.1.4. 근세
마리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거리감은 가톨릭 신자들가 쟁론을 벌이는 가운데 점점 더 반 마리아적 입장으로 경직되어 갔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측에서는 마리아 신심의 엄청난 확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 신심운동은 특히 종교개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던 몇몇 나라에서 더욱 강렬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금세기에 들어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비로소 마리아 운동이라고 부를 만한 마리아론적 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구원사업에서의 마리아 중재성, 마리아의 영적 모성, 그리고 공동 구속자성등 세 가지 주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마리아는 대표적으로 하느님께 ‘예’를 발함으로써 이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로써 본질절으로는 아니더라도 통합적으로 구속자를 위해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는 중재자이며, 공동 구속자라고 지칭될 수 있다.
2.1.5. 2차 바티칸 공의회
과거의 이상적인 과장 행위에서 벗어나 보다 성서적이고 교부학적 주제, 즉 마리아의 찬미 자체가 아니라 마리아의 구세적 기능을 밝히려 하였다.
“과연 마리아는 당신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소명을 받아 사람들을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일에 협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셨다”(교회헌장 65항)
2.2. 마리아 공경의 타당성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가 이해한 바를 전수받고, 교회의 성서 이해를 주장하며 그와 함께 한다. 또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 관해서, 가장 높고 거룩한 삼위이고 표현할 수 없이 신비스럽고 혹은 우리의 구원과 영원을 부여하는 하느님에 관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한 고백에는 분명 인간에 대한 부분이 있다. 예를들면 신경의 부수적인 부분에 단순히 사람이 된 말씀의 역사안에서 신앙에 대한 인류의 배반을 표상하기 때문에 나오는 인간 존재들이 있는 것처럼, 또한 신앙을 표상하기 위해 나오는 인물들도 있다.7)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유일한 신앙이며 신학이지만 사실 인간에 대한 신학은 있다.8) 인간학이 아니고 신학안에 포함된 인간, 즉 인간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함으로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현양하는 그런 것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신학, 인간 자체에 대하여 하나인 영원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가장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시켜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신앙고백이 있다. 인간에 대해 말함이 없이 하느님만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에 깊숙히 개입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고 – 더욱이 인간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기에 인간은 신앙이 강론해야 하고 신학이 설명하는 내용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은 필연적으로, 단순히 부수적으로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마리아, 주님의 어머니, 복된 동정 어머니에 관한 신앙의 가르침이 가능한 이유이다.
2.3.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서 마리아
완전한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면, 마리아는 자기 정신의 신앙과 자기의 복된 태 안에,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즉 자기 존재의 모든 힘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을 받아들인 까닭에 완전한 그리스도 신자요 그리스도다운 모범적인 인간 존재이다. 완전한 그리스도교가 구세사 안에서의 외적 사명과 개인 생활 사이의 완전한 호응이라면 그 호응은 마리아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마리아는 영원한 아버지의 육화된 말씀을 가시적으로 또한 감촉할 수 있게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구원의 외적인 가시적 역사 안에 단순한 인간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의미 깊고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시에 마리아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자기의 유일한 임무를 절대적으로 무조건의 전체적 신앙의 동의로 자기 개인 생활 안에서 충만히 받아들이고 실현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타인들의 구원을 위하는 사심 없는 봉사 정신으로 자기 자신의 은총의 영향을 빛내는 것일진대, 마리아는 그리스도 신자로서 의미하는 바의 가장 완전한 본보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 즉 그녀가 신앙의 동의에 의하여 그리고 자기 신적 모성의 물리적 실재 안에서 수태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구원받는 자들의 공동체 안의 인간 존재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자이고 완전한 모든 사람의 대표이고 교회와 은총과 구속과 하느님의 구원의 의미를 완전히 나타내 주는 전형이요 표상이다.
2.4.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 교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9)
1)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머물렀다.
2)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다.
3)마리아는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
4)마리아는 죄없는 삶을 영위하였다.
5)마리아는 사망 후 ‘승천’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기초와의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이므로 여러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그 진리들 사이에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11항).
3.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탄생을 보통 인간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동정녀로서 마리아의 위치는 오늘날 점점 더 가톨릭 교회안에서 조차 논란이 되고 있다. 사도신경의 이 귀절은 여러 신학자들, 특히 에밀 브룬너(1889-1966)의 견해에 의하면 단지 상징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교회 신조를 고백하는 신학자-칼 바르트(1886-1968)-들도 적지 않다.
3.1. 제기된 문제들
3.1.1.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동정녀 출산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의 관심사는 자연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하나의 기적 설화이다.
3.1.2. ‘종교학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세계의 영향으로 성서가 기적적 출산 관념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하였을 가능성이 있다(Ex: 구약 – 이사악, 삼손, 사무엘 ; 신약 – 세자요한). 즉 예수 탄생의 경우에 성서의 다른 예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절대적이고도 강력하게 하느님이 개입하심을 말하는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신화론적 진술이다.
3.1.3.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를 제외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동정녀의 출산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 점이 동정녀의 출산과 이를 증언하는 마태오와 루가의 보도를 의심쩍게 만든다.
3.2. 반대논증
3.2.1. 자연과학적 반론
동정녀 출산에 대한 신조는 자연 과학적 지반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조는 세계가 ‘인격적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전제하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자연 발생 안에 삽입시킬 수 있다. 창조개념으로부터 기적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연과학적 입장에서의 정당한 반론이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3.2.2. 종교학적 반론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외없이 ‘개종자’들이었고 당연히 이교의 입장과 인습을 이어 받았으며 또 그리스도교화 할 수 있었던 부분은 그리스도교화 하였다(Ex : 크리스마스). 이는 다른 비슷한 일에도 해당되며 따라서 이교도들의 여신들이 구세주의 모친과 함께 제시되었다. 그러나 ‘유비’가 계보학은 아니며 외현형식이 유사하다고 해서 원천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수는 없다. 관건이 되는 것은 ‘기적적인 탄생’이지 ‘동정녀의 출산’이 아니다. 성서저자들이 그리스도를 신적 구세주로 선포하기 위해서 주의 기적적 탄생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을 신학적 진술 명제의 언어로써 표현한 것은 상상할 만 하다. 이들은 후대의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시대 사람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의 언어양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3.2.3. 주석학적 반론
마리아에 관한 성서적 증언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유년기 역사, 이를테면 동정녀 출산에 대한 신조의 원천이 문제가 된다. 성서저자들의 일차적 관심사가 史實이나 事實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는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보다 더욱 분명하게 된다. 성서저자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한 남자의 관여없이 발생한 예수 탄생 설화 ‘일차적으로 신학적 교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신학적 실재가 우리 앞에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설화가 ‘단지’ 하나의 신학적 교리일 따름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로도 드러나게 되는가 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물음이다.
3.3. 동정녀 출생의 의미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우리 인간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 육화는 다른 많은 사건처럼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임의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뒤바꾸는 의미를 지닌다. 육화는 역사를 종말론적 완성으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이 육화를 ‘구세사적 사실’(救世史的 事實)이라고 표현한다. 육화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건이어서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동반하고 있다. 역사가 구원의 전표하에 흐르고 있는 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여 역사적 차원을 초월하게 되며 바로 이러한 가운데 구세사적 사실의 본연의 의미가 현시되는 것이다. 여기서 뜻하는 바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서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의 사실 즉 공문서 기록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또 기록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십자가 처형 사실은 역사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실임이 절대적으로 고수되어야 한다. 만일 나자렛 예수가 골고타 언덕에서 참으로 처형되지 않았더라면 십자가에서의 우리의 구속도 부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 사실이 신앙자체를 위해서는 그리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처형이란 그 당시 흔히 볼수 있었던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고 또 그 당시의 처형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던 까닭에 십자가 처형의 증인들은 아마도 대다수가 그와 같은 잔인한 사건 발생을 이미 여러 번 목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 형틀에 못박혔다고 해서 쉽사리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럴 수는 업었을 것이다. 따라서 범죄자로서 사형을 당한 이 사람이 하느님의 참 아들이고 세계의 구원자며 인간의 구원자였다는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다만 신앙의 눈으로만 그 죽음에 담겨있는 구원의 뜻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사적(史的)인 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이다.
동정녀로부터의 출생은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의심할 나위없이 구세사적 사실이다. 우리가 방금 행한 통찰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동정녀 출산에 대한 문제는 성서가 생물학적인 사건을 보도하려는가, 아니면 상징적 사건을 보도하려는가에로 환원될 수 없다. 이 양자택일은 실제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상징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란 기껏해야 하나의 기적에 불과하다. 이 기적은 보고 경탄할 수는 있으나, 이에서 구원신앙을 위한 동기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상징이 아무리 의미가 있다 해도 역사적 실재에 근거를 두지 않은 단순한 상징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은 한 농가의 외양간에 있는 이정표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동정녀로부터의 출생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된다. 자연과학도 종교과학도 그리고 역시-비판적 주석학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신학적 명상만이 오로지 이 문제를 해결한다. 신학적 명상은 사실성(史實性) 문제를 논함으로써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성 문제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이 문제의 중요성은 구원사건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본래의 질문의 중요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게 된 동정녀 출산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시작에 대한 하나의 표징이다. 동정녀 출산은 새로운 창조행위로서, 첫 번째 창조와 유대를 맺고 있다. 오로지 하느님으로 말미안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재로 현존하고 있다. 동정녀 출산의 신앙조항은 마리아론적 명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명제임이 분명해진다. 이 조항은 어머니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진술하기 전에 아드님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조항은 주변적 진리가 아니라 중심 위치에 자리하는 핵심적인 진리이다. 이 조항에서 우리는 구원의 차원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구원은 순천히 은총에서 오는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이다. 성부가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의 태를 열어서 성자 그리시도 안에서 구현되도록 한 것이다.
이 조항은 또한 마리아론적 명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물론 구원이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기에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자유로운 신앙의 결단을 전제로 한다. 이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의 책임있는 수용자가 되는 것이다. 이 선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작품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 진정한 인간적 자세를 구세주의 모친이 되어야 할 한 여인이 완전한 상태로써 보여준다. 이 여인은 단순하게 믿고 조건없이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10)
현재의 가톨릭 교회에서 선포된 마리아에 관한 교의는 대부분이 초대교회에서 시작된 신앙에 의한 것들이다. 교부들은 이단에 맞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려 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면서 얻은 것이 마리아에 관한 교의이다. 이러한 마리아에 대한 신앙은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많은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현대에 와서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오스딩의 원죄론과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 신앙은 비본질적이지나 않은지, 또한 마리아 교의가 일차적인 명제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신학적 교리인지, 아니면 정통적인 가르침처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것만을 강조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