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 후기(1054년-1300년)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과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하고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 십자군운동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도 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한데서 비롯됩니다. 이에 교황 올바노 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습니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라는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절시켰습니다.
2) 대중의 종교운동(십자군 운동의 변질)
십자군 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세기 동안 8차례(또는 4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십자군 운동이처음에는 그리스도교적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습니다. 또한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은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가지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습니다.
3) 십자군 운동의 결과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기사 수도회의 탄생과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예술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4) 십자군 운동과 청빈 운동
십자군 운동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본 가난한 그리스도의 모슴을 생생한 모습으로 마음 속에 그리게 되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염원은 청빈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청빈운동은 교회의 혁신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청빈운동은 이단으로 변질되었고 이러한 이단운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긍정적인 방법으로는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 대표적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탁발 수도회는 이단자의 개종과 선교활동, 13세기에 설립된 대학에서 학술활동을 통하여 문화발달에 공헌하게 됩니다.
3. 종교개혁 시대(1300-1500년)
14세기부터 15세기의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빕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 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습니다. 교황청의 아비뇽천도와 대분규(서구 대이교)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속에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에 빠졌습니다.
1) 아비뇽 교황시대(1305-1377년)
14-15세기 중엽까지 교회는 잇따른 불행한 대사건들로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교황권이 약화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외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1305년 보르도의 주교인 프랑스 출신 고뜨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리옹에서 대관식을 갖고 끌레멘스 5세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필립 4세와 교회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가는 것을 연기하고 아비뇽에 머물면서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후 이탈리아 정국의 불안과 사회적 요소가 로마 시민의 반 교황 봉기등으로 교황들의 아비뇽 체류는 7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교황청의 아비뇽 장기체제에 대하여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통탄하며 혹평을 가하였고, 많은 지성인들은 아비뇽 교황들을 프랑스왕의 포로라고 하면서 이 사건을 “교황의 바빌론 유배”라고 비꼬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섯명의 아비뇽 교황들은 개인적으로는 신심깊은 성직자들로서 교황청과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들이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주교들이나 국가들이 그들을 한 사람의 프랑스 주교로 과소평가하게 되고 교황의 보편성은 상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아비뇽의 교황청 과세확장 징수 방법은 전 유럽에 걸쳐 교회에 대한 원성을 드높게 만들었는데 세금 징수관들은 체납자들에게 성사 수여 금령이나 전례참석 금지 등의 영신적 처벌을 내려 많은 문제와 반발을 야기시켰습니다.
2) 교황청 대분규(서구의 大離敎)
13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에 돌아옴으로써 아비뇽교황시대는 끝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시 “서구의 대이교”라는 시련을 맞게 되는데 그레고리우스 11세 서거 후 로마에서 추기경(프랑스 11명, 이탈리아 4명, 스페인 1명)단의 분열로 선거의 장기화와 프랑스 교황의 선출을 우려하는 로마 시민들의 무력 위협속에서 바리의 대주교인 이탈리아 출신 쁘리냐느를 교황으로 선임하게 됩니다.
새 교황 울바노 6세는 전제 군주형 인물로 추기경들과 불화를 빚자 프랑스와 스페인 추기경들은 교황선거가 강압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를 선언하고 프랑스 왕의 사촌인 제네바의 대주교 로베르 추기경을 교황 끌레멘스 7세로 선출하여 아비뇽을 교황의 거주지로 제공합니다.
1409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열린 공의회는 당시의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인 베네딕도 13세를 해임하고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하였으나 새 교황은 1년만에 사망하여 다시 요한 23세를 선임하였으나 다른 두 교황은 피사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교회는 3명의 교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대 이교는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년)의 결정으로 끝나게 되는데 여기서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가 정통 교황으로 선정되었다가 사임하고 마르띠누스 5세를 새로 선출하게 됩니다.
(1) 서구의 대이교 결과
첫째, 신학의 쇠퇴
이러한 혼란속에서 신학적 자유주의는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 하였고, 이는 신학자들의 대립과 이에따른 신학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둘째, 성직자들의 영신적 사명 망각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일부 르네상스 교황들은 문화적으로는 업적을 쌓았지만 그들의 시대적 소명 즉 교회쇄신 작업에 소흘했고, 귀족 출신의 고위 성직자들도 그들의 영신적 사명을 망각하였습니다.
셋째, 대중신심활발
한편, 일반 대중의 신심 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예를 들면 로사리오,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을 가져왔습니다.
넷째, 물질주의와 개인적 신심발달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 추구하는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개혁의 요구
교회 안에서는 비나노가 함께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중세교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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