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의 쇄신

15세기 초부터 가톨릭도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1.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년)와 바젤 공의회(1431-1491)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르네상스 교황들도 산발적으로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교황청과 교황들이 이것을 새행할만한 내적이고 종교적인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의회 필요성의 요구와 교회쇄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몇 차례의 연기 끝에 1545년 5월에 가톨릭 교회 쇄신 공의회는 트리엔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2.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트리엔트 공의회는 타락한 교회에 대하여 반상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 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리엔트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종겨 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개혁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의회로 교황 바오로 3세를 거쳐 비오 4세의 재위기간에 폐회 되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체로 3기로 구분됩니다.
1) 제 1기(1545-1548년)
· 성서만이 유일한 신앙의 원천이 된다고 한 프로테스탄트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성전 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 하였습니다.
· 불가따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 프로테스탄트의 은총 절대설과 정의 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습니다.
2) 제 2기(1551-1552년)
·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 현존”과 “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 되었습니다.
· 제 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 지방 주교들과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하였습니다.
3) 제 3기(1562-1563년)
·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 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에 개최되었다가 이듬해 폐회되었습니다.
· 중요한 심의 대상이었던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고, 그밖에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의 설립, 주교의 임명, 주교의 시노두스, 강론 등에 대한 교령이 반포되었습니다.
4) 공의회 이후
· 가톨릭 교회는 교황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쇄신이 일어났습니다.
· 트리엔트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에는 유럽의 종교였던 가톨릭 교회가 리베리아 반도의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 세계선교에 나섭니다. 동서에 걸친 세계종교에로 발돋음하게 됩니다.
· 17세기 후반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적으로 정면 도전을 받게 됩니다.
·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신학을 반대하는 이단운동인 얀세니즘,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은 가톨릭 신학에 전면 도전하였습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가톨릭 교회의 쇄신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15세기 초부터 가톨릭도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1.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년)와 바젤 공의회(1431-1491)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르네상스 교황들도 산발적으로 교회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교황청과 교황들이 이것을 새행할만한 내적이고 종교적인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의회 필요성의 요구와 교회쇄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몇 차례의 연기 끝에 1545년 5월에 가톨릭 교회 쇄신 공의회는 트리엔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2.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트리엔트 공의회는 타락한 교회에 대하여 반상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 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리엔트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종겨 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개혁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의회로 교황 바오로 3세를 거쳐 비오 4세의 재위기간에 폐회 되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체로 3기로 구분됩니다.
    1) 제 1기(1545-1548년)
    · 성서만이 유일한 신앙의 원천이 된다고 한 프로테스탄트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성전 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 하였습니다.
    · 불가따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 프로테스탄트의 은총 절대설과 정의 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습니다.
    2) 제 2기(1551-1552년)
    ·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 현존”과 “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 되었습니다.
    · 제 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 지방 주교들과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하였습니다.
    3) 제 3기(1562-1563년)
    ·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 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에 개최되었다가 이듬해 폐회되었습니다.
    · 중요한 심의 대상이었던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고, 그밖에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의 설립, 주교의 임명, 주교의 시노두스, 강론 등에 대한 교령이 반포되었습니다.
    4) 공의회 이후
    · 가톨릭 교회는 교황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쇄신이 일어났습니다.
    · 트리엔트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에는 유럽의 종교였던 가톨릭 교회가 리베리아 반도의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 세계선교에 나섭니다. 동서에 걸친 세계종교에로 발돋음하게 됩니다.
    · 17세기 후반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적으로 정면 도전을 받게 됩니다.
    ·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신학을 반대하는 이단운동인 얀세니즘,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은 가톨릭 신학에 전면 도전하였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