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Byzanz

 비잔틴   Byzanz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Konstantin, 306~337년)의 재위 기간은 옛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를 변화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로마 제국의 주요 정책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동방으로 세력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동방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kletian)의 궁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의 관심을 점점 더 동방으로 기울였다. 이러한 사실을 로마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기울어지면 질수록 로마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더 강하게 이교에 집착하였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극 2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가 이교도의 수도인 로마에서 열렸다. 황제는 이 축제가 이교도의 색채를 띠고 있다는 이유로 축제에 참가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 위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도록 지시하자 황제에 대한 원로들의 증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326년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 대신 보르포루스(Bosporus) 근처에 그리스도교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ꡐ신 로마ꡑ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330년 5월 11일 황제의 새로운 거주지는 ꡐ콘스탄티노폴리스ꡑ로 결정되었다.


  그리스도교적인 색채를 띠는 신 로마와 이교도적인 색채를 띠는 옛 로마 사이의 대조는 자연스럽게 두 도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와 교회에 더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고, 그 대신 옛 로마의 주교와 교회는 점점 황제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옛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노선을 견지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점점 더 깊이 동로마 황제에게 종속되는 상태로 빠져들어 가 단지 궁정 주교로 폄하되는 동안 서방의 교회는 독자적으로 발전해 갔고, 황제의 통치권으로부터 로마의 수위권을 확보해 나갔다. 만일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으로 이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서방 교회의 독립성과 자유는 확보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 교회 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문제가 관심사로 등장했을 때, 즉시 어려움이 나타났다. 381년 개최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알렉산드레아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물론 로마의 지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 없이 확고하게 인정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지위가 격상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법적인 효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명예적인 지위를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지위를 격상시킨다는 명목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격하되는 효과를 초래하였다. 로마 주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서방에 오로지 하나의 총대주교가 존재하고(로마), 동방에는 3개의 주교좌(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가 존재하여 서로 우위를 다투는 상황은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교황 다마소(Damasus) 1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지위를 격상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규정을 거부하였다. 이미 1년 전에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는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와 함께 380년 2월 28일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제국의 헌법으로 격상시켜 이른바 국가 교회를 창설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 칙령은 교회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매우 중요한 문서였다. 그 결과 동방의 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에게 예속되었다. 서로마 황제의 권력이 점차 약화되면 될수록 동로마는 더욱 강하게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서방에서 관철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새로 선출되는 모든 교황들은 자신의 선출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에게 알려야만 했고, 황제에게 교황 선출에 대한 비준을 청원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가끔 정치적인 이유로 이 비준은 거절되기도 하였다. 일부 교황들(마르티노 1세, 콘스탄티노 1세)은 황제의 법정에 서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당하기도 했으며, 거기서 정치적 또는 신학적인 이유로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황제들은 자신의 칙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몇몇 교황들의 목숨을 노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여러 차례에 걸쳐 황제가 주장하는 이단을 거부했다는 명목으로 주교들이 추방당하거나 아니면 처형당하였다. 황제의 미움을 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들조차도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동로마의 황제들이 서방에 위치하고 있던 라벤나(Ravenna)의 수도 대주교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고 모색했을 때에도 다툼과 반목이 있었다. 황제 레오 3세 역시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그리고 그리스를 로마의 총대주교조로부터 분리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좌로 귀속시켰을 때 동일한 태도를 취하였다. 황제는 교황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떠맡았으나. 때로는 이 의무를 망각하기도 했으며, 가끔은 이 의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 모든 것들은 서방의 교회로 하여금 더 많은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울러 교황들로 하여금 비잔틴으로부터 서서히 등을 돌려 독일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