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로부터 Filioque

 성자로부터 聖子~ Filioque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벼조하는 아리우스주의와 펠라지우스주의 이단설과 관련해서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등장하였다. 이 이단에 반대하여 381년 개최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ꡒ성령은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로부터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흠숭과 영광을 받으신다ꡓ라고 선언한 바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ꡐ대신앙 고백ꡑ으로서 교회의 전례에 도입된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앙 고백」을 수용하였다. 589년 톨레도(Toledo)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앙 고백」에 한 구절을 추가하였다. 즉 ꡐ성부로부터 발하시는 성령ꡑ에 ꡐ성자로부터ꡑ(Filioque)를 추가하여 ꡐ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시는 성령ꡑ으로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의 교회는 이 추가 구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교회는 ꡒ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발하신다ꡓ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ꡐFilioqueꡑ는 성부와 그리고 ꡐ성자로부터ꡑ를 의미한다. 7세기와 8세기에 ꡐFilioqueꡑ 라는 추가어는 프랑스, 영국 그리고 북부 이탈이아에서는 수용되었다. 그래서 ꡐ카롤링거 저술ꡑ은 ꡒ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로부터 발하신다ꡓ라는 그리스의 표현 양식을 비난하였다. 하지만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그리스의 표현 양식을 옹호하였다.


  칼 대제의 궁정 경당에서는 ꡐFilioqueꡑ라는 표현이 포함된 신앙 고백문을 노래로 부르기도 하였다. 드디어 808년 예루살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예루살렘에 정주하고 있던 그리스의 수도승들이 올리브 산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의 수도승들이 ꡐFilioqueꡑ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격하였다. 공격을 받은 독일의 수도승들은 이 사실을 로마에 보고했고, 교황 레오 3세는 이 보고서를 칼 대제에게 송부하였다. 칼 대제는 ꡐFilioqueꡑ를 변호하는 작업을 지시하였다. 809년 아헨(Aachen)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ꡐFilioqueꡑ라는 표현을 지지하였다. 교황 레오 3세는 ꡐFilioqueꡑ가 지니고 있는 신학적인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ꡐFilioqueꡑ를 전례에 도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ꡐFilioqueꡑ를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었고, 아울러 그리스 교회는 만일 전례에 ꡐFilioqueꡑ를 도입할 경우, 이것을 새로운 개혁으로 생각할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베네딕토 8세는 로마에서의 성찬 전례 거행때 ꡐFilioqueꡑ를 삽입하였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에 모종의 역할을 담당했던 ꡐFilioqueꡑ를 둘러싼 논쟁은 1274년 리옹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던 동로마 황제 미카엘(Michael) 8세는 자신의 사절을 통해 서한을 보냈다. 미카엘 8세는 이 서한에서, 자신은 로마 교회의 신앙, 교황의 수위권 그리고 ꡐFilioqueꡑ를 인정한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미카엘 8세는 신앙 고백을 노래할 때 ꡐFilioqueꡑ를 포함시키지 않는 동방 교회의 전례 관습을 그대로 유지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의 잠정적인 일치는 백성들과 성직자들의 저항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ꡐFilioqueꡑ를 둘러싼 논쟁은 1431년부터 1445년 사이에 개최되었던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초청으로 동로마 황제 요한 7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그리고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이 1438년 페라라(Ferrara)와 피렌체에 왔으나, 그사이 공의회는 연기되고 말았다. 오랜 격론 끝에 드디어 1439년 합의 문서에 서명하게 되었다. 동방 교회는 라틴 교회의 교부들이 마치 하나의 원리로부터, 그리고 하나의 호흡을 통해 ꡒ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한다ꡓ라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리고 ꡐFilioqueꡑ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오해의 소지가 없기 때문에 일치를 위해서는 아무런 장애도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온 대부분의 동방 교회 주교들은 피렌체에서 이루었던 합의를 철회하였다. 148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피렌체에서 합의했던 신앙 고백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로써 오랜 산고 끝에 태어난 피렌체의 합의 문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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