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성서적 근거(3)

 

2.4.  성찬례에 대한 다른 텍스트들


1) 신약성서에는 부활한 예수와 함께 한 식사 공동체에 대한 기사(루가 24,13-35; 요한 21,1-14)가 나오는 데, 이는 성찬례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께서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체험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는 (교리교수를 위한 구성를 드러내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루가 24,13-35): 이야기의 시작에는 제자들의 체념이 나온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낯선 사람을 만나 함께 가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성서의 전통에 비추어 생각해보는 대화 속에서 예감이 자라나고 (“우리 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이 예감은 빵을 나누면서 확실한 인식으로 변한다(루가 24,31.35).


티베리아 호수가에서의 예수의 발현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게 구성되어있다(요한 21,1-14):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물가에 서 있는 낯선이의 말을 따르고, 질문과 확인의 과정을 거친 후 아침식사를 할 때 부활하신 분을 만나게 된다(참조: 루가 24,41-43; 사도 10,41). 




2) 성찬례에 대해서 이미 신학적으로 많은 숙고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성찬례 텍스트는 빵과 포도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제하고 있지만 정확히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빵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관심이 더 집중되어 있다. 바오로의 견해에 의하면 이 친교가 구원론적이고 그리스도론적 특성을 지닌다: 이 친교는 그리스도의 피와 맺는 일치로서, 구원을 선사하며(1고린 10,16) 주님의 다스림의 영역에 속하도록 한다(1고린 10,21). 그리고 이 친교는 교회론적 특성을 지닌다. 하나의 빵을 나눔으로써 교회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가 형성된다.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7).


그런데 빵을 통해 선사되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빵을 나눔으로서 이룩되는 교회와의 일치와 서로 밀접한 연관 관계에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 교회를 꾸짖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성찬례에 앞서 식사에서 가난한 이들을 창피하게 한 사건을 일컬어 “주님의 교회를 얕보는 것”(1고린 11,22)일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1고린 11,27)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통해서 고린토 교회에서는 ‘배불림의 식사’, 즉 보통 식사에 이어서 성찬례가 거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가 ‘배불림의 식사’에서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공동체를 손상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찬례가 주님의 성찬이 되지 못한다(1고린 11,20)고 힐책한다. 그에게는 두 가지 식사가 모두 주님의 성찬인 것이다.


고린토 교회의 모습이 암시하듯이 성찬례의 진행 순서에 대해서는 이미 신앙의 첫 세대(50년대)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추정된다. 신약성서의 여러 가지 성찬례의 전승에서도 드러난다: 바오로와 루가가 전하는 전승에서는 아직도 빵과 잔을 나누는 것이 식사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원래의 예식 모습이 반영된다. 그러나 마르꼬와 마태오가 인용한 전승은 빵과 잔을 나누는 성찬 예식이 식사의 말미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예식의 순서를 바꾼 때문이 아니라 ‘배불림의 식사’와 성찬례를 서로 관련이 없게 거행한 것 때문이다.  




3) 요한복음에는 성찬례를 제정하는 기사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최후만찬 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모습을 전해준다(13,1-24). 그렇다고 요한은 성찬례가 예수께 유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두가지 주요 성사인 세례와 성체성사 그리고 이와 함께 교회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신학적으로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분명하게 표현한다(요한 19,33-37).


요한복음에서 성찬례에 대한 언급은 파스카 축제(6,4)와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5-15)의 맥락 안에 자리하는 빵에 대한 말씀에서(6,22-65) 발견된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론적 측면과 성사적 측면은 구분되어야 한다. 두 측면에서 공통적인 것은: 예수와 살아있는(“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육신의 죽음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빵에 대한 전체의 언사 (6,26-58)에서 “먹고 마심”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앞에서 광야에서 5천명이 배불리 먹은 사건(6,1-15)은 요한복음의 기적들이 모두 그러하듯 하나의 “표징”이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바는 그저 일시적으로 배를 부르게하는 빵 이상의 것이다. 즉 자신과의 친교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신다. 예수 자신이 “생명의 빵” (6,35.48; 참조: 6,33.51a)이다. “이 빵을 먹음”(6,51a)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와의 친교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다” (그리고 “마신다)는 말은 빵에 대한 언사의 첫 부분에서 철저히 인격적(personal)으로 이해되어야한다: 그리스도와의 신앙적인 친교를 나타내는 표상이며, “굶주리다”, “묵마르다”(6,35)는 말은 생명 자체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그러나 “굶주리다”, “목마르다”, “빵”, “먹다”등의 은유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사용되는 것은 복음사가가 그 배경에 성찬의 먹고 마심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요한 6, 51b에서부터 분명한 주제로 드러난다: 빵에 대한 언사의 두번째 부분에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성찬례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첫번째 부분에서 믿음과 관련하여 언급된 무조건적인 요구와 약속이 두 번째 부분에서 성찬례적인 행동과 결부된다(참조: 6,40.47 그리고 6,53 이하). 이제는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일치가 거칠게 들리는 표현인 “내 살”, “내 피”라는 말과 연결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6,56).


요한이 사용하는 “살”(σαρξ)이라는 말은 바오로나 공관복음서에서 사용하는 “몸”(σωμα)이라는 말마디보다 아주 강하게 물질적인 구체성을 나타낸다. 이런 점은 “살을 씹어 먹는다”(πρωγω)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요한복음의 反假現論的 경향을 잘 드러낸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지상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진정한 육신을 지니지 않았다는 오류에 대항하기 위해서 육화는 물론 성사도 아주 사실적(realism)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별 언사에서는 인격적인 믿음과 성사적인 행동 외에 세번째의 요소가 뚜렷히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계명을 지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따라 좌우되는데, 이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된다 (13,34 이하; 14,21; 15,10.12; 더 나아가서: 1요한 3, 23; 4,16).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반가현론적 경향을 고려하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실현하는 세가지 요소들 (믿음, 식사, 사랑) 사이의 논리적 관련이 분명해진다. 하느님(혹은 신적인 말씀)과의 일치는 순수 영신적이고 비역사적인 신앙 안에서 이룩된다거나 사회적인 관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에 반대해서 계시와 신앙의 육화적 구조가 강조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요한 1,14).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일치는 세상이나 인간 역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육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믿음은 사람이 되신 아드님의 역사를 십자가 상에서 피흘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마지막까지 형제 자매들을 위해 투신하는 사랑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 믿음과 사랑은 성찬의 공동체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믿음이 순수 정신적인 믿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한은 먹고 마시는 것을 “인자의 살과 피”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써서 강조하였다(6,53). 그러므로 세가지 관점, 즉 사람이 되신 말씀에 대한 고백, 구체적인 투신의 모습으로 육화된 사랑, 그리고 성사의 가시적인 거행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와같은 육화의 신앙을 통해서 진정한 삶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이 해소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요한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요한 13,1-20)를 왜 최후만찬의 중심부에 두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육화는 단순히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신성과 인성의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비천하고 보잘 것없는 식탁의 봉사까지라도 실현할 정도로 낮아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런 식탁의 봉사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표징이 된다 (참조: 13,1).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자극적으로 대조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맡겨 주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떠나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셨다”(13,3). 그리고 예수께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를 가져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수건으로 닦아 주신다. 제자들은 서로 식사를 할 때 이 모습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13,15). 이렇게 해서 제자들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고백과 비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형제 자매들에 대해 봉사하는 것과, 그리고 가시적으로 거행하는 식탁의 공동체와 서로 연결지었다.






2.5. 요약과 문제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행한 최후만찬은 그분이 생전에 제자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사, 즉 메시아 시대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공동체를 선취하는 식사와 밀접히 연결된다. 그러나 최후만찬은 지금까지의 식사공동체를 가능케 하였던 예수의 임박한 죽음과 그로 인해 전개되는 새로운 상황을 앞두고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여타의 식사공동체와는 구분된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서 예수는 파스카 전통에 따라서 거행된 식사 중에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내시면서 결정적인 뜻풀이의 말씀을 하신다.


1)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준다.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건네시면서 “이는 내 몸입니다”(마르14,22),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마르 14,45)라고 해석를 덧붙이신다. “몸과 피”는 예수 자신 즉 많은 이를 위하여 죽기까지 헌신하는 예수 자신을 뜻한다. 이를 통해서 십자가 죽음은 많은(=모든) 이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2) 예수의 몸과 피를 뜻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자신을 죽기까지 헌신한 그분과 하나가 된다.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1고린 10,6). 다시 말해서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죽음과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인 도래 사이의 기간에 그와의 (성사적) 일치를 가능케한다. 요한은 예수와의 일치가 인간에게 생명을 의미하고,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성찬의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요한 6,53-55)고 강조한다.


3) 모든 이를 위해서 죽기까지 헌신한 예수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사람 또한 예수와 같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성찬의 음식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다른 신자들과의 일치에로 연결되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음식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형성한다는 것(1고린 10,17)을 강조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일치를 생각하지 않고 성찬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고린토 교회에 대해서 “주님의 성찬을 먹는 것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1고린 11,20), “주님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1고린 11,27)라고 비난한다. 루가복음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단지 전례적 열성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나 요한복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설명한 것도 공동체의 일치를 형성하고 지향하는 성찬례의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


4) 지속적으로 성찬례를 거행하라는 위탁의 말씀이 비록 예수에게서 직접 유래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의 뜻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교는 그 성립 초기부터 성찬례를 거행하였는데, 이 성찬례를 통해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바치신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선포하면서 현재화하며, 종말에 있을 주님의 재림을 희망한다.


5) 신약성서는 성찬의 음식에 예수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수하면서 예수와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찬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예수께서 성찬의 음식 안에 현존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래서 정확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물론 빵과 포도주 안에 예수께서 현존하시게 되는 것은 성찬의 참여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함은 당연하게 전제되었다.


6) 예수는 과연 자신의 죽음을 대속, 속죄의 제물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 반대측에서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근거로 든다. 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그런 예수가 마지막에 다시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속죄의 죽음을 생각하였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의 죽음이라는 표현은 예수 자신에게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의 해석이라고 평가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약성서의 많은 대목들이 증언하듯이 예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것이 하느님 나라 선포의 내용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견해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슈어만(H.Schürmann)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과 인간 사랑에 대해서 끝까지 순종한다는 의미로서, 즉 자신의 “爲他的 實存”(Pro-Existenz)의 절정으로서 이해했다고 주장한다.1) 또 다른 견해로는, 예수의 대속행동은 인간의 죄로 인해 모욕을 받은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얻기 위한 보상의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어야 했으나 이를 거부한 이들을 대신해서 수행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 나라 선포의 핵심인 원수 사랑과 비폭력의 행동을 거부하였지만, 예수는 이들을 대신해서 이를 실천하고, 더 나아가서 십자가 상에서 이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운명을 몸소 겪고 그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면서 자기 죽음을 헌신의 場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죄인들에게 다시 한 번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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