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성사
“準聖事”(Sacramentalium)의 개념 형성은 12세기에 성사 개념이 확정되는 것과 맞물린다. 12세기에 성사를 일곱 가지로 규정하자, 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면서 신자들의 사랑을 받던 교회의 예식들, 이를테면 세례수 축성, 도유를 위한 각종 기름의 축성, 성찬례를 위한 제단의 축성등이 “준성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준성사에 대해서 전례헌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60. 그 밖에 자모이신 성교회는 준성사들을 제정하였다. 이들은 성사들을 어느 정도 모방한 거룩한 표징들로서 효험 특히 영적 효험을 표시하며, 교회 간구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준다. 준성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성사들의 그 본래의 효력을 받도록 예비되고, 갖가지 경우에 생활이 성화된다.
61. 그러므로 성사와 준성사들의 효력은 이러한다. 즉 잘 예비한 신자들에게는 그들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빠스카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성화된다. 이 신비에서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그 효능을 얻는다. 또한 거의 모든 물질은 올바르게 사용되기만 하면 인간의 성화와 하느님의 찬미를 지향할 수 있다“.
준성사의 기본 형태는 축복이다. 축복은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축복을 내리는 하느님만이 아니라 축복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어서 하느님의 축복을 간구한다. 이런 축복은 이미 구약성서에서도 일정한 형태로 나타난다. 축복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나 음료 혹은 들판과 수확물과 같은 사물에도 적용된다. 축복을 원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풍요하고 넘치는 삶을 바라는 데에 있는데, 신앙인들에게 이런 삶이란 하느님의 고유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구약에서 나타난 축복을 기원하는 인간의 큰 소망이 그대로 유지된다. 바울로는 유대교의 축복 기원 양식을 그리스도교적 축복 기원 양식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유대적인 축복 기원인 “평화” 대신에 그리스도교적인 “은총”이 자리한다. 은총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성서적 상황을 근거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축복과 축성의 형태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항상 세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 하느님의 창조물을 이원론적으로 聖과 俗의 분야로 나누어서 가능한 많은 것을 거룩하게 하려는 유혹; (2) 악한 세력을 인간에게서 분리해서 자립적인 위험한 힘으로 간주하면서 예식을 통해서 쫒아 버리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 (3) 축복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나 물건 안에 마술적인 힘을 불어 넣어준다는 미신.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만연된 미신과 잘못된 실천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를 했지만, 개신교에도 사람과 물건에 대한 축복이 많이 남아있다. 동방교회는 오히려 가톨릭 교회보다 더 많은 축복의 형태가 있다: 십자가 표시, 기름의 축복, 분향, 성수 등.
새교회법은 비오 12세의 회칙 “Mediator Dei”(DS 3844)에 근거해서 성사와 준성사를 차이를 설명한다: 준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현실화시키는 힘(ex opere operato)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轉求로(ex Ecclesiae impetratione; ex opere operantis Ecclesiae) 효력을 낸다(1166조). 물론 교회의 전구는 교회가 기도하도록 움직이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교회법은 (남용을 방지하지 위해서) 준성사가 교회 권위에 소속되어 있고, 그 집행에 있어서 교회 권위에 의해 승인된 예식과 경문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1167조).
1983년의 교회법은 다음과 같이 용어를 구분한다: 사람을 기름을 발라서 축복하는 것을 축성(consecratio)이라고 한다; 장소와 물건을 도유와 함께 축복하는 것은 봉헌(dedicatio)라고 한다; 순전히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 사람, 장소, 물건을 도유 없이 축복하는 것은 축복[benedictio (constitutiva)]라고 한다. 이런 축성, 봉헌, 축복은 오직 주교나 권한을 부여받은 신부들만이 할 수 있다(1169조, 1206조 이하). 새 교회법은 평신도들도 축복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세례성사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대부모가 대자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의 축복이 평신도의 축복보다 양적으로 더 많은 축복을 가능케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교황의 축복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축복보다 더 많은 효력을 낸다는 생각은 마술적인 상상이라고 하겠다.
1984년에 공포된 <축복 예식서>에는 신학적, 실천적으로 주목할만한 지적이 나타난다. 즉 이 예식서는 축복은 모든 것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신앙고백의 표현이라고 본다. 또한 예식서는 축복이 교회의 전례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래서 가능하면 축복이 말씀의 전례와 공동의 기도와 함께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즉 준성사는 단지 외적인 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위해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epiklesis(혹은 anamnesis와 epiklesis)의 구조를 갖춘 전례적 행동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묵주나 성물을 축복할 때에도 그저 십자가만 얼른 긋지만 말고 최소한 짧은 경문과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데에만 사용될 수 있는 사물에만 축복이 가능하다: 무기를 축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신의 축복을 받으려는 소망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종교에든 다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축복이 동시에 과제를 의미 한다 축복을 받아서 스스로 축복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듯이 말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창세 12,2-3). 그러므로 축복을 청하는 데에 있어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축복을 받으려는 기복적인 자세를 버리고, 다른 이에게 축복의 표지가 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갖추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준성사
“準聖事”(Sacramentalium)의 개념 형성은 12세기에 성사 개념이 확정되는 것과 맞물린다. 12세기에 성사를 일곱 가지로 규정하자, 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면서 신자들의 사랑을 받던 교회의 예식들, 이를테면 세례수 축성, 도유를 위한 각종 기름의 축성, 성찬례를 위한 제단의 축성등이 “준성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준성사에 대해서 전례헌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60. 그 밖에 자모이신 성교회는 준성사들을 제정하였다. 이들은 성사들을 어느 정도 모방한 거룩한 표징들로서 효험 특히 영적 효험을 표시하며, 교회 간구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준다. 준성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성사들의 그 본래의 효력을 받도록 예비되고, 갖가지 경우에 생활이 성화된다.
61. 그러므로 성사와 준성사들의 효력은 이러한다. 즉 잘 예비한 신자들에게는 그들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빠스카 신비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성화된다. 이 신비에서 모든 성사와 준성사가 그 효능을 얻는다. 또한 거의 모든 물질은 올바르게 사용되기만 하면 인간의 성화와 하느님의 찬미를 지향할 수 있다“.
준성사의 기본 형태는 축복이다. 축복은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축복을 내리는 하느님만이 아니라 축복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어서 하느님의 축복을 간구한다. 이런 축복은 이미 구약성서에서도 일정한 형태로 나타난다. 축복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나 음료 혹은 들판과 수확물과 같은 사물에도 적용된다. 축복을 원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풍요하고 넘치는 삶을 바라는 데에 있는데, 신앙인들에게 이런 삶이란 하느님의 고유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구약에서 나타난 축복을 기원하는 인간의 큰 소망이 그대로 유지된다. 바울로는 유대교의 축복 기원 양식을 그리스도교적 축복 기원 양식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유대적인 축복 기원인 “평화” 대신에 그리스도교적인 “은총”이 자리한다. 은총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성서적 상황을 근거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축복과 축성의 형태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항상 세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 하느님의 창조물을 이원론적으로 聖과 俗의 분야로 나누어서 가능한 많은 것을 거룩하게 하려는 유혹; (2) 악한 세력을 인간에게서 분리해서 자립적인 위험한 힘으로 간주하면서 예식을 통해서 쫒아 버리고자 하는 잘못된 신앙; (3) 축복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나 물건 안에 마술적인 힘을 불어 넣어준다는 미신.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만연된 미신과 잘못된 실천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를 했지만, 개신교에도 사람과 물건에 대한 축복이 많이 남아있다. 동방교회는 오히려 가톨릭 교회보다 더 많은 축복의 형태가 있다: 십자가 표시, 기름의 축복, 분향, 성수 등.
새교회법은 비오 12세의 회칙 “Mediator Dei”(DS 3844)에 근거해서 성사와 준성사를 차이를 설명한다: 준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현실화시키는 힘(ex opere operato)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轉求로(ex Ecclesiae impetratione; ex opere operantis Ecclesiae) 효력을 낸다(1166조). 물론 교회의 전구는 교회가 기도하도록 움직이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교회법은 (남용을 방지하지 위해서) 준성사가 교회 권위에 소속되어 있고, 그 집행에 있어서 교회 권위에 의해 승인된 예식과 경문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1167조).
1983년의 교회법은 다음과 같이 용어를 구분한다: 사람을 기름을 발라서 축복하는 것을 축성(consecratio)이라고 한다; 장소와 물건을 도유와 함께 축복하는 것은 봉헌(dedicatio)라고 한다; 순전히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 사람, 장소, 물건을 도유 없이 축복하는 것은 축복[benedictio (constitutiva)]라고 한다. 이런 축성, 봉헌, 축복은 오직 주교나 권한을 부여받은 신부들만이 할 수 있다(1169조, 1206조 이하). 새 교회법은 평신도들도 축복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세례성사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대부모가 대자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의 축복이 평신도의 축복보다 양적으로 더 많은 축복을 가능케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교황의 축복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축복보다 더 많은 효력을 낸다는 생각은 마술적인 상상이라고 하겠다.
1984년에 공포된 <축복 예식서>에는 신학적, 실천적으로 주목할만한 지적이 나타난다. 즉 이 예식서는 축복은 모든 것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신앙고백의 표현이라고 본다. 또한 예식서는 축복이 교회의 전례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래서 가능하면 축복이 말씀의 전례와 공동의 기도와 함께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즉 준성사는 단지 외적인 표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위해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epiklesis(혹은 anamnesis와 epiklesis)의 구조를 갖춘 전례적 행동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묵주나 성물을 축복할 때에도 그저 십자가만 얼른 긋지만 말고 최소한 짧은 경문과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데에만 사용될 수 있는 사물에만 축복이 가능하다: 무기를 축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신의 축복을 받으려는 소망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종교에든 다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축복이 동시에 과제를 의미 한다 축복을 받아서 스스로 축복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었듯이 말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창세 12,2-3). 그러므로 축복을 청하는 데에 있어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축복을 받으려는 기복적인 자세를 버리고, 다른 이에게 축복의 표지가 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갖추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