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예언술·풍수지리·전생·환생 신드롬

우리의 오랜 관습이라고 하여 많은 이들이 새해를 시작할 때에 한 해의 운수를 점치며 토정비결을 본다. 뿐만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스포츠 신문 등에 실리는 ‘오늘의 운세’로 하루 운수를 미 리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재미로 본다고 하지만 하루 내내 그 점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성서구절을 가지고 점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아침에 아무데나 성서의 한 면을 펼치고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선택하여 하루의 운세를 점치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을 따라 하루를 지
내겠다는 좋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점의 종류가 다를 뿐, 점을 보는 것은 마찬가
지이다. 무작위로 펼친다고 하지만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지 않으면 몇 차례씩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아 그 말씀과 비슷한 좋은 일이 그 하루 중에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기대
하는 것이다.
이사를 하거나 혼인을 할 때에도 ‘길일’을 택한다. 날을 잘 택해야 재물도 따르고 손(損)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거는 것이다. 곧 행복을 운수에 맡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후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묘자리를 고르거나 이미 쓴 묘를 이장하는 사람들도 많
다. 후손에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화가 생기는 원인이 묘를 잘못 썼기 때문이라고 믿
는 것이다. 사실 어떤 장소가 인간의 쾌·불쾌를 좌우할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쾌적함
을 느끼고, 또 어떤 곳에서는 음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좋은 장소를 가려 집
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비록 돌아가신 분이라 하더라도 그 시신을
좋은 곳에 묻는 것이 자식된 도리이다. 또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기 마련이다. 반면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가 마치 묘를 쓴 장소에 좌우된다는 물리적 관계로 취급되는 일은 분명
도가 지나친 것이다.
또 요즈음 전생·환생 신드롬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전생이나 후생을 이야기하는 환생은
그리스도교의 육신부활 교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 새로
운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또 이 세상에서 살았던 공과에 따라 상선벌악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과 달리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을 받거나 벌을 받아야 할 존재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환생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나 자신이 전생에 인도의 공주였다고 가정하
자. 무슨 잘못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 이 세상을 잘못 살아 후생에 어떤 동물, 가령
개가되었다고 가정하자. 전생의 인도 공주는 오늘의 나라는 존재와 별개의 존재이듯이 후
생에 그 개는 분명 나와 별개의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서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다는 일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스도교 육신부활은 나의 영혼이
라는 인간의 반쪽만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 구체적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나 자신의 존재
로서 하느님 앞에서 상을 받거나 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환생에 의해서, 곧 불멸하는 영혼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그
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부활신앙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예들은 모두 하느님을 마치 종처럼 ‘부리려는’ 태도들이며, 하느님의 섭리
를 거스르는 행동들이다. 여기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의무나 양심, 책임감 등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하느님을 비인격적 존재인 우주의 기(氣), 또는 영으로 여기고 있으며. 세상
에서 건강하고 유복하게 사는 것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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