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쁘리아누스-이단자 세례논쟁

 

20.2. 이단자 세례논쟁


치쁘리아누스는 생의 말년에 이단자들의 세례문제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252년 초 막뉴스라는 사람이 치쁘리아누스에게 ꡔ만일 이단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가톨릭교회에 들어오게 될 때 그에게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하는가ꡕ 하고 질문하였다.  치쁘리아누스는 이단자들의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는 이와는 다른 전통을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교회 자체 내에서도 주교들이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정을 요청하였으므로 255년과 256년에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어 치쁘리아누스의 설을 재확인하고 그 결정사항을 로마의 스테파누스 교황에게 알렸다.  그러나 교황은 뜻밖에도 단호한 어조로 ꡔ전승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새롭게 해서는 안되며ꡕ,이단자가 오면 다시 세례를 베풀 필요없이 참회 예식에 받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전통이니 따르지 않을 때 주교는 물론 아프리카 교회가 파문을 받게 될것이라고 경고 하였다.  이에 앞서 교황은 같은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에 파문을 경고한 바 있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는 한 지역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이미 보편 교회의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단호한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쁘리아누스는 교황의 고압적인 명령에 대해 256년 9월에 재차 카르타고 주교회의를 개최하였고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 하였다.  이로써 이 문제는 치쁘리아누스와  스테파누스 사이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치쁘리아누스는 로마교회와 단절된 상태로 있을 수 없었다.  그가[가톨릭 교회 일치]란 그의 저서에서 그렇게도 강조해온 교회의 일치가 깨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교회와 카르타고 교회 사이의 이 대립은 뜻밖에도 박해로 인해 논쟁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257년에 박해를 강화하면서 제국 내에 특히 주교와 사제들을 처단하도록 하였다. 스테파누스는 257년 8월 2일에 순교하였으며 치쁘리아누스는 257년에 체포되어 빠데르누스 총독의 재판을 받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1년 후 소환되어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에 의해 새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교신께 제사를 지내라는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자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 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9월 16일에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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