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디디무스-생애

 

41. 소경 디디무스




41.1. 생애


디디무스는 3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며, 4살 때에 이미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에게 “소경”이란 별명이 붙게되었다. 그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스스로 노력하여 기적과 같이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그를 신임한 나머지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실 아타나시우스는 오리게네스에 의해 꽃피웠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오랜 신학 전통을 그를 통해 계승, 발전시키려 하였다. 디디무스는 뛰어난 학식과 모범적인 생활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주교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디디무스의 제자들 중에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예로니무스, 루피누스, 빨라디우스 등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있다. 예로니무스는 그를 계속 스승이라 부르고, 그의 가르침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한다. 디디무스는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노선에 따라 니체아 공의회의 신조(信條)를 고수하였지만, 아리우스이단 논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거나 또는 신체적인 이유 때문에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귀양을 가야 했을 때에도 그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의 나날은 신학연구와 기도로 짜여져 있었다. 그는 특히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수도자와 같이 생활하였으며, 빨라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은수자 안토니우스의 암자를 4번이나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는 398년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신도로 머물러 있으면서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정반대로 나타난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는 신학노선이나 생활에 있어 극히 모범적인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150년 후인 6세기 중엽 오리게네스 논쟁이 발생하자 사정이 돌변하였다. 디디무스는 오리게네스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끝까지 옹호하였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학설 중에서 영혼의 선재사상과 윤회사상이 문제가 되어 제5차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오리게네스가 단죄받자, 오리게네스의 추종자였던 디디무스도 함께 단죄받게 되었다. 이 단죄는 제6차, 7차, 8차 공의회에서도 재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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