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나그 함마디의 영지주의 도서관, 바실리데스,발렌티누스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2-3세기 교회에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교회가 논쟁을 피할 수 없었던 영지주의는 다양하고 개별적으로도 매우 세분화한 학설체계에서 발생하였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경쟁하면서 발전한 영지주의의 구원론과 이전에 사용된 근본 개념들의 수용이었다. 영지주의 구원론의 주요 관심사는 세상에서 악에 대한 설명, 인간이 세상에 처한 상황, 인간의 구원 가능성이었다. 구원은 피조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완전히 초월적인 미지의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태고에 인류의 타락으로 참된 하느님과 분리되고 구약의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데미우르구스가 세상을 창조하였다. 이때문에 데미우르구스가 창조한 세상은 본디 악하다. 인간은 참된 본성에 따라 참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나, 인간 안에 있는 신적 섬광은 세계에 얽매인 물질적인 육체로 말미암아 데미우르구스에 예속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동경과 목표는, 물질에서의 해방과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유보된 인식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참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악에 어떤 책임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복음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계시하였다.

다양하고 세분된 영지주의 철학체계의 근본 특징은 이와같이 간략히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상세히 연구하기는 어렵다. 영지주의의 외경들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영지주의는 가톨릭 교회에 존재론적인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가 후대에 영지주의 작품의 전승을 철저히 막아 교부들의 논박서들이 영지주의에 관하여 보고하거나 인용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이레네우스,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누스, 에피파니우스의 부정적인 진술 때문에 영지주의의 작품들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개찬되었다고 전제하였다.



5.2..1.1. 나그 함마디의 영지주의 도서관

앙리-샤를르 푸에와 장 도레스가 1948년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영지주의 도서관을 발견하였다는 보고는 학문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45년 12월 펠라케 모하에드 알리 에스-삼만은 두 동생과 함께 룩소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나그 함마디 근처에서, 콥트어로 씌어진 13편의 사본이 담긴 점토 항아리를 발견하여 카이로에 내다 팔았다. 사본 2-13호는 오늘날 콥트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본 1호는 1952년 취리히의 융연구소에 팔렸으며, 이 사본은 “융 사본”이라고 불린다.

거의 완전하게 잘 보존된 사본들은 4세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며, 사본들에 실린 작품들은 4세기 이전에 씌었다. 특히 콥트어 번역인 52편의 그리스-영지주의 작품, 복음서, 사도행전, 대화록, 묵시록, 지혜서, 편지, 설교 등이 중요하다. 물론 이 작품들의 표제가 원전의 유형과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모음집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진리의 복음」과 콥트어로 씌어진 「토마 복음」이다. 영지주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최초로 알아낼 수 있다는 중요성 때문에 사본들에 관한 활발한 연구활동이 바로 시작되었다. 비평본, 번역, 원전에 관한 학문적 평가는 상당히 진척되었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특히 원본을 완전하게 보완할 수 없을지라도 이레네우스의 진술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나그 함마디의 발견물에는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 작품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적 작품들도 있으며, 이 부류의 작품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곧, 이교적 영지주의 작품들은 그리스도교화하였으며, 그리스도교적 작품들은 이교화하였다. 어쨌든 이 작품들도 2세기 이전의 영지주의 발전에 대한 어떤 귀납적 추론을 돕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영지주의의 기원은 여전히 어둠에 싸여있으나, 영지주의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레니즘 세계를 알기 위하여 계속해서 노력해 왔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라이첸슈타인과 부세트를 비롯한 비교종교 학파 및 불트만과 그의 학파의 시도가 그러하였듯이, 영지주의를 그리스 철학, 종교, 유다교, 페르시아 문헌, 신약성서 등에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올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영지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의문시된다. 영국의 교과 방침과 콜페의 최근 연구를 토대로 영지주의 운동이 1세기 이전에 그리스도교와 함께 또는 경쟁하면서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2세기에 발전한 영지주의의 학설체계를 보면 플라톤의 철학, 신화학, 유다교, 동방종교들에서 사용된 많은 근본 개념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근본 개념들이 당시에 영지주의적 의미를 지녔는지 또는 후대에 영지주의가 수용하였는지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논증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인식론으로서의 영지주의와 근본 개념, 신화, 영지주의 학설체계를 전제하는 구원론으로서의 영지주의를 용어상 구분한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 학설체계로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학설체계로 발전하였으나, 두 체계 사이에 공통적인 개념성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마법사 시몬이 첫번째 영지주의자라는 교부들에게서 물려받은 확신을 결코 옳지 않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매우 다른 두 체계, 곧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의 학설체계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5.2.1.2. 바실리데스

바실리데스의 인물과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른 사료들이 증명하듯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바실리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치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그밖의 모든 정보는 불확실하다. 바실리데스의 작품은 24권으로 된 복음서 주석과 시편 또는 송가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가 어떤 복음서를 주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리게네스는 그가 고유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저자가 바실리데스의 학설체계를 매우 다르게 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관된 상을 세울 수 없다. 이 경우 동일한 체계의 서로 다른 부분들 또는 그리스도교와 상반된 묘사로 그의 학설체계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확실한 진술이라 여겨지는 클레멘스의 보고는 인간의 고난이 늘 과실에 기인한다는 바실리데스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인간은 실제로 과실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곧, 과실 없이 고통당하는 어린이들, 순교자들, 더구나 그리스도 자신은 죄에 대한 성향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물론 순교는 죄, 더욱이 과실에 관한 성향을 정화하기 때문에,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선행으로 여겨야 한다.

이와 달리 히폴리투스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재이 일어났다. 히폴리투스는 바실리데스가 발전적 유출설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태초에 무가 있었으며, 하느님조차 “비존재”였다. 하느님은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자체에 만물을 품고 있는 세상의 씨앗을 창조하였다. 이 세상의 씨앗에서 세 단계로 구분된 종속적인 친자관계가 발전하였다. 세 단계의 친자관계는 각각 더 낮은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며,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순수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친자관계가 아버지께 다시 도아간 반면, 세번째 친자관계는 이를 위해 먼저 정화되어야 한다. 씨앗덩어리에서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통치자”가 생겨났다. 그 다음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두번째 통치자가 아듬에서 모세에 이르는 구약의 하느님이다. 세번째 친자관계의 해방을 위해 마침내 복음이 세상에 왔다. 이 복음은 첫번째 통치자의 아들인 예수를 아버지 하느님의 존재 이상으로 나타낸다. 그를 통해서 세번째 친자관계에 있는 사람은 구원받고, 피조물 전체가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

이와 달리 다른 사료들은 365개의 하늘의 창조자인 천사들을 기술하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키레네 사람 시몬이 그리스도 대신에 죽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정보로 바실리데스의 학설체계를 구성할 수 없지만, 그가 살던 당시 영지주의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위협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5.2.1.3. 발렌티누스

이 시기의 두번째 중요한 영지주의자는 발렌티누스이다. 바실리데스의 생애보다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만, 마찬가지로 발렌티누스 인물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그의 학설체계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진 편이다. 이레네우스와 에우세비우스가 보고하듯이 그는 이집트 추신으로 140년경에 로마로 갔다. 그는 고곳에서 정통신앙에서 등을 돌려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그는 155년 이후에 동방, 아마도 키프로스로 갔을 것이며, 로마로 돌아온 뒤 160년 초에 죽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몇몇 단편만이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작품에 남아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설교와 시편과 편지가 있다. 히폴리투스의 작품에 그의 찬가 한 편이 실려 있다.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작품 가운데 직접 그의 작품으로 보이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발렌티누스의 제자들이 계승한 그의 학설체계는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이 비교적 자세히 보고하여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 발렌티누스의 학설체계가 실제로 그에게서 나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의 학설체계는 다음의 특징을 나타낸다. 신적인 플레로마는 쌍으로 이루어진 30개의 에온들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첫 네 쌍이 가장 중요하고 원原-여덟 신적 존재를 형성하며, 여기서 다른 에온들이 나온다. 죄로 인해 이러한 쌍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에 영적 인간은 천상의 상대자와 다시 일치해야 한다. 마지막 에온인 지혜가 세상에서 신적인 요소를 낮추려는, 곧 영원하고 마지의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지나친 열망 때문에 죄가 생긴다. 아울러 천상의 구원자는 마침내 플레로마와 재일치로 이끄는 신적인 부분을 구원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세 그룹, 영적 인간(pneumatiker), 영혼적 인간(psychiker)과 물질적 인간(hyliker)으로 분류된다. 첫번째 그룹은 완전히 구원받고 플레로마와 일치되며, 두번째 그룹은 부분적으로만 일치되며, 세번째 그룹은 파멸된다.

정통교회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유보된 인식을 통한 영지주의의 구원론에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영지주의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 세상의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구약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구원을 위태롭게 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영지주의 추종자들을 배척해야만 했다.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문학적 투쟁은 그들 가르침의 오류를 드러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참된 영지”, 곧 신앙 안에서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을 교회의 성서적․전통적 신학에서 긍정적으로 발전시켰다. 2-3세기의 그리스어권 교회에서 문학적으로 투쟁한 대표적 인물은 리용의 이레네우스와 로마의 히폴리투스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참된 영지를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최초의 위대한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였다. 이들의 투쟁은 2-3세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그밖의 다른 몇몇 이단(마르치온, 몬타누스주의, 단원론)과도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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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2-3세기 교회에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다. 당시 교회가 논쟁을 피할 수 없었던 영지주의는 다양하고 개별적으로도 매우 세분화한 학설체계에서 발생하였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경쟁하면서 발전한 영지주의의 구원론과 이전에 사용된 근본 개념들의 수용이었다. 영지주의 구원론의 주요 관심사는 세상에서 악에 대한 설명, 인간이 세상에 처한 상황, 인간의 구원 가능성이었다. 구원은 피조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완전히 초월적인 미지의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태고에 인류의 타락으로 참된 하느님과 분리되고 구약의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데미우르구스가 세상을 창조하였다. 이때문에 데미우르구스가 창조한 세상은 본디 악하다. 인간은 참된 본성에 따라 참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나, 인간 안에 있는 신적 섬광은 세계에 얽매인 물질적인 육체로 말미암아 데미우르구스에 예속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동경과 목표는, 물질에서의 해방과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유보된 인식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참된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악에 어떤 책임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복음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계시하였다.

    다양하고 세분된 영지주의 철학체계의 근본 특징은 이와같이 간략히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상세히 연구하기는 어렵다. 영지주의의 외경들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영지주의는 가톨릭 교회에 존재론적인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가 후대에 영지주의 작품의 전승을 철저히 막아 교부들의 논박서들이 영지주의에 관하여 보고하거나 인용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이레네우스,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누스, 에피파니우스의 부정적인 진술 때문에 영지주의의 작품들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개찬되었다고 전제하였다.


    5.2..1.1. 나그 함마디의 영지주의 도서관

    앙리-샤를르 푸에와 장 도레스가 1948년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영지주의 도서관을 발견하였다는 보고는 학문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45년 12월 펠라케 모하에드 알리 에스-삼만은 두 동생과 함께 룩소르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나그 함마디 근처에서, 콥트어로 씌어진 13편의 사본이 담긴 점토 항아리를 발견하여 카이로에 내다 팔았다. 사본 2-13호는 오늘날 콥트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본 1호는 1952년 취리히의 융연구소에 팔렸으며, 이 사본은 “융 사본”이라고 불린다.

    거의 완전하게 잘 보존된 사본들은 4세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며, 사본들에 실린 작품들은 4세기 이전에 씌었다. 특히 콥트어 번역인 52편의 그리스-영지주의 작품, 복음서, 사도행전, 대화록, 묵시록, 지혜서, 편지, 설교 등이 중요하다. 물론 이 작품들의 표제가 원전의 유형과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모음집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진리의 복음」과 콥트어로 씌어진 「토마 복음」이다. 영지주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최초로 알아낼 수 있다는 중요성 때문에 사본들에 관한 활발한 연구활동이 바로 시작되었다. 비평본, 번역, 원전에 관한 학문적 평가는 상당히 진척되었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특히 원본을 완전하게 보완할 수 없을지라도 이레네우스의 진술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나그 함마디의 발견물에는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 작품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적 작품들도 있으며, 이 부류의 작품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곧, 이교적 영지주의 작품들은 그리스도교화하였으며, 그리스도교적 작품들은 이교화하였다. 어쨌든 이 작품들도 2세기 이전의 영지주의 발전에 대한 어떤 귀납적 추론을 돕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영지주의의 기원은 여전히 어둠에 싸여있으나, 영지주의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의 헬레니즘 세계를 알기 위하여 계속해서 노력해 왔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라이첸슈타인과 부세트를 비롯한 비교종교 학파 및 불트만과 그의 학파의 시도가 그러하였듯이, 영지주의를 그리스 철학, 종교, 유다교, 페르시아 문헌, 신약성서 등에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올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영지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의문시된다. 영국의 교과 방침과 콜페의 최근 연구를 토대로 영지주의 운동이 1세기 이전에 그리스도교와 함께 또는 경쟁하면서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2세기에 발전한 영지주의의 학설체계를 보면 플라톤의 철학, 신화학, 유다교, 동방종교들에서 사용된 많은 근본 개념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근본 개념들이 당시에 영지주의적 의미를 지녔는지 또는 후대에 영지주의가 수용하였는지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논증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인식론으로서의 영지주의와 근본 개념, 신화, 영지주의 학설체계를 전제하는 구원론으로서의 영지주의를 용어상 구분한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 학설체계로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학설체계로 발전하였으나, 두 체계 사이에 공통적인 개념성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마법사 시몬이 첫번째 영지주의자라는 교부들에게서 물려받은 확신을 결코 옳지 않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매우 다른 두 체계, 곧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의 학설체계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5.2.1.2. 바실리데스

    바실리데스의 인물과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른 사료들이 증명하듯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바실리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치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그밖의 모든 정보는 불확실하다. 바실리데스의 작품은 24권으로 된 복음서 주석과 시편 또는 송가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가 어떤 복음서를 주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리게네스는 그가 고유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저자가 바실리데스의 학설체계를 매우 다르게 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관된 상을 세울 수 없다. 이 경우 동일한 체계의 서로 다른 부분들 또는 그리스도교와 상반된 묘사로 그의 학설체계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확실한 진술이라 여겨지는 클레멘스의 보고는 인간의 고난이 늘 과실에 기인한다는 바실리데스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인간은 실제로 과실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곧, 과실 없이 고통당하는 어린이들, 순교자들, 더구나 그리스도 자신은 죄에 대한 성향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 물론 순교는 죄, 더욱이 과실에 관한 성향을 정화하기 때문에,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선행으로 여겨야 한다.

    이와 달리 히폴리투스의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재이 일어났다. 히폴리투스는 바실리데스가 발전적 유출설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태초에 무가 있었으며, 하느님조차 “비존재”였다. 하느님은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자체에 만물을 품고 있는 세상의 씨앗을 창조하였다. 이 세상의 씨앗에서 세 단계로 구분된 종속적인 친자관계가 발전하였다. 세 단계의 친자관계는 각각 더 낮은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며,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순수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친자관계가 아버지께 다시 도아간 반면, 세번째 친자관계는 이를 위해 먼저 정화되어야 한다. 씨앗덩어리에서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통치자”가 생겨났다. 그 다음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두번째 통치자가 아듬에서 모세에 이르는 구약의 하느님이다. 세번째 친자관계의 해방을 위해 마침내 복음이 세상에 왔다. 이 복음은 첫번째 통치자의 아들인 예수를 아버지 하느님의 존재 이상으로 나타낸다. 그를 통해서 세번째 친자관계에 있는 사람은 구원받고, 피조물 전체가 다시 아버지께 돌아간다.

    이와 달리 다른 사료들은 365개의 하늘의 창조자인 천사들을 기술하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키레네 사람 시몬이 그리스도 대신에 죽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정보로 바실리데스의 학설체계를 구성할 수 없지만, 그가 살던 당시 영지주의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위협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5.2.1.3. 발렌티누스

    이 시기의 두번째 중요한 영지주의자는 발렌티누스이다. 바실리데스의 생애보다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만, 마찬가지로 발렌티누스 인물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그의 학설체계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진 편이다. 이레네우스와 에우세비우스가 보고하듯이 그는 이집트 추신으로 140년경에 로마로 갔다. 그는 고곳에서 정통신앙에서 등을 돌려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그는 155년 이후에 동방, 아마도 키프로스로 갔을 것이며, 로마로 돌아온 뒤 160년 초에 죽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몇몇 단편만이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작품에 남아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설교와 시편과 편지가 있다. 히폴리투스의 작품에 그의 찬가 한 편이 실려 있다.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작품 가운데 직접 그의 작품으로 보이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발렌티누스의 제자들이 계승한 그의 학설체계는 영지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이 비교적 자세히 보고하여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 발렌티누스의 학설체계가 실제로 그에게서 나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의 학설체계는 다음의 특징을 나타낸다. 신적인 플레로마는 쌍으로 이루어진 30개의 에온들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첫 네 쌍이 가장 중요하고 원原-여덟 신적 존재를 형성하며, 여기서 다른 에온들이 나온다. 죄로 인해 이러한 쌍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에 영적 인간은 천상의 상대자와 다시 일치해야 한다. 마지막 에온인 지혜가 세상에서 신적인 요소를 낮추려는, 곧 영원하고 마지의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지나친 열망 때문에 죄가 생긴다. 아울러 천상의 구원자는 마침내 플레로마와 재일치로 이끄는 신적인 부분을 구원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세 그룹, 영적 인간(pneumatiker), 영혼적 인간(psychiker)과 물질적 인간(hyliker)으로 분류된다. 첫번째 그룹은 완전히 구원받고 플레로마와 일치되며, 두번째 그룹은 부분적으로만 일치되며, 세번째 그룹은 파멸된다.

    정통교회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유보된 인식을 통한 영지주의의 구원론에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영지주의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 세상의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구약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구원을 위태롭게 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영지주의 추종자들을 배척해야만 했다.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문학적 투쟁은 그들 가르침의 오류를 드러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참된 영지”, 곧 신앙 안에서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을 교회의 성서적․전통적 신학에서 긍정적으로 발전시켰다. 2-3세기의 그리스어권 교회에서 문학적으로 투쟁한 대표적 인물은 리용의 이레네우스와 로마의 히폴리투스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참된 영지를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최초의 위대한 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였다. 이들의 투쟁은 2-3세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그밖의 다른 몇몇 이단(마르치온, 몬타누스주의, 단원론)과도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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