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은 서기 1775년(영조 51년) 남인 집안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이 소사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창원을 본관으로 하는 황사영의 집안은 10대가 벼슬을 지낸 당당한 양반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도 진사시에 그제하여, 한림학사를 지냈고, 학문이 높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황사영이 태어나기 전에 작고하였다. 학문하는 집안의 자손답게 황사영은 영특하고, 모든 친구들보다 뛰어난 재간이 있었다. 학문에 힘쓴 보람이 있어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그의 영특함이 마침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어전에 불리어 격려를 받았으며, 따뜻하게 어루만짐을 받는 성은을 입었다. 이 특은을 입은 후로 황사영은 당시의 관습대로 국왕의 손이 닿았던 손을 비단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재간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때에 관례를 치르고 ‘덕소’라는 자를 쓰게 되었다.
황사영이 천주 신앙과 맺어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1790년에 마재(오늘날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한 부락)에 사는 명문가 정씨 가문에서 부인을 맞았다. 그의 부인 정명련(마리아)은 정약현의 따님이었으며, 약현은 천학서를 연구하여 선교신부들의 가르침 없이 천주 신앙을 얻어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중심 인물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맏서형이었다. 이로부터 마재와 서울의 정씨 집안을 드나들며 동전 한문 서학서(東傳 漢文 西學書)를 접하였고, 처숙들로부터 천주 교리를 익히게 디어 마침내 천주교에 입교하여, 알렉산델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일단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로 그는 세상의 부귀 영화를 jfl고 대과에 나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를 봉행하는 생활에 몰두하였다. 이 때에 황사영은 ꡒ천주학을 시작한 다음 해에 나라에서 금령을 강화하니, 친척과 친구들이 천주교를 물리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ꡓ고 증언하였다.
그는 입교한 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교우집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리 서적을 필사하여 신앙지식을 더하였고, 서적을 나누어 주기에 힘썼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성직자로 영입되어 서울에 도착하여 계동 최인길(마지아)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사목 활동을 개시하자, 황사영은 주 신부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에 최창현과는 사우(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친구),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과는 혈당(생명으로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으로의 맺음을 다하였다. 비록 그는 20여 세에 지나지 않은 젊은 몸이었으나, 그의 학식과 신앙의 뛰어남으로 한국 교회의 큰 재목으로 촉망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그를 신임하였으며, 그도 주문모 신부를 가까이 모셔 한시도 떠나기를 원치 않았으나, 주 신부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1년에 불과 서너 차례 정도 밖에 상면치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마음 아파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자기 집으로 주 신부를 모셔 미사성제를 드리고 성사받기에 힘썼다.
1801년 초부터 신유박해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검거되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한국 교회가 겪게 된 최초의 국가적 규모의 전국적인 박해였다. 전국을 휩쓰는 검거 선풍 가운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황사영의 이른바 사우, 혈당 등 한국 교회의 지도적 교우들이 모두 순교하게 되었으며, 한국 교회가 모시고 있던 오직 한 분의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도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의 씨를 말리고자 달려든 박해 당국자의 광란 속에 한국 교회는 누란의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표적 신자로서 교우 사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황사영이었기에, 그에게도 박해 당국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박해의 추이를 보기 위해 일단 집을 벗어나 계동 어느 군사의 집과 삼청동 산 속에서 수일을 지내다가 동대문 밖 송재기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환난 중에서도 침착하게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전후 대책을 취해 오던 황사영은 김한빈(베드로)과 같이 서울을 벗어나 깊은 두메골 교우촌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양반 상제를 가장하고 상복을 입고 피신의 길응ㄹ 재촉하여 예천 땅을 거쳐 제천 땅 깊숙한 산골 마을인 배론(오늘날의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한 마을)으로 찾아가 교우 김귀동의 옹기가마 토굴 속에 은신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휴양차 내려온 ‘이상주’라 일컬으며 숨어 있으면서도 교회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김한빈을 서울로 올려 보낸 서울에서의 박해와 교회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조선 교회가 모시고 있던 단 한분의 성직자를 새남터에서 잃고, 지도적 교우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며 많은 교우들이 처참한 박해에 학살되고 가장과 가족을 잃고 노상에 헤매는 교우들의 참상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의 가슴은 메어지듯이 아팠다. 또한 풍지박산에 가까운 상태의 위기에 몰린 조선 교회를 생각하고 비탄에 젖었다.
이러한 아픔과 비탄 속에서 그는 북경 교회에 한국 교회의 고난을 알리고 원조를 받아 교회를 다시 소생시키고 천주의 신앙을 편안하게 같이 나눌 수 있는 복지를 이루어야겠다는 사명 의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어두컴컴하고 불편한 토굴 속에서 이러한 그의 구상을 담은 편지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는 이 편지가 반드시 북경 주교에 전달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밀사가 옷 속에 꿰매어 감출 수 있도록 하늘하늘한 명주천에다 쌀알만한 잔글씨로 썼다. 1백 21행 1만 3천자에 이르는 장문의 황사영의 백서는 종이에 쓰이지 않았기에 주목을 끄는 것이 아니라, 황사영의 간절한 소망과 세계적 경륜, 그리고 뜨거운 신앙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에 종교적으로 뜻있는 편지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그가 기도하듯이, 피를 토하듯이, 정성과 열정을 다하여 작성한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올리는 서한이었다. 작성자는 황사영이나 백서에는 ‘다묵’이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묵은 그의 동지의 한 사람인 황 심(도마)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황 심이 그간 몇 차례에 걸쳐 주문모 신부의 밀사로 북경 교회를 내왕하였고 북경에서 영세한 사람이기에 북경 교회 성직자들과 안면이 있어서 백서의 신빙성을 더하고 북경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백서의 문장은 당당하고 정성스러웠다. 그는 먼저 이 서한을 올리게 된 사정을 말하고 금번의 박해로 말미암아 겪게 된 한국 교회의 고난의 사실을 순교자의 사적을 열전 형식으로 기술하면서 적었는데, 그 순교사적 기록의 태도는 매우 엄정하다. 순교자 개인별로 그가 직접 견문하거나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만을 상세하게 북경 주교에게 보고하고 있다.
또한, 주문모 신부 자수의 사정과 순교의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참상을 기록하고 난 후에 차분하게 한국 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첫째는 북경 교회와 한국 교회의 비밀 연락을 위한 제안이고, 둘째는 한국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기했으며, 셋째로 한국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 세 가지를 제시했다. 즉, 교황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책, 청나라 정치권에 의한 개입의 방책과 서양 군사력 동원에 의한 방책을 건의하였다. 외세의 침략을 자극할 위험성이 있는 문제이나 그것은 오로지 신앙 자유 구현을 위한 일념에서 제기된 것이지, 박해 당국자가 소리 높여 비난하는 바와 같은 정치적 의도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대외 봉쇄의 쇄국사회에서 자라난 한 학자 교우의 세계 경륜과 신앙 열의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 백서는 황사영이 배론에 은거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배론으로 찾아 온 황 심이 부연사행의 말몰이꾼으로 자주 북경을 내왕하는 교우 옥천희와 연락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밀송하기로 합의하였다. 옥천희는 주문모 신부와 황 심의 주선으로 북경교회를 거듭 방문한 일이 있는 교우였다. 그러나 이때에 옥천희가 1801년 말에 북경에 사행을 따라 들어가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귀국하다가 본국에서 박해가 벌어져 교회가 큰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국경에서 접하고 다시 만주에 들어가 중국 교회측에 이 사실을 급고하고 귀국하다가 불행하게도 1801년 초가을에 국경에서 체포되어 황사영의 웅대하고도 착실한 교회 부흥책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황사영, 황 심 등의 순교를 초래하게 되었다.
체포된 옥천희는 황 심과의 관계를 실토하니 황 심이 양력 11월 1일에 서울에서 검거당했다. 황 심은 포도청에서 최조받는 가운데 박해 당국이 도피한 황사영 체포에 혈안이 되어 전국을 수색하며 그로 인한 교우들의 희생이 너무 큰 것을 알았다. 이에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고 박해를 끝내기 위해 마침내 동지인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이리하여 포졸들이 배론을 급습하여, 황사영을 검거케 되었다.
그가 체포되면서 그의 심혈의 희망이 담겨졌던 백서가 당국에 압수되었다. 또한 황사영을 시종하던 김한빈도 같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양력 11월 5일).
황사영은 평소 자기 주변 교우들에게 일이 극단에 이르면 자기를 밀고하라는 말을 해 왔던 터인지라 포졸이 은신처로 몰려와 그를 체포할 때 놀라거나 동요치 않았다. 다만 나랏님이 잡아 주셨던 손목을 비단으로 감고 다녔는데 포졸들에게 이 손목만은 만지지 말라고 타일렀고 포졸들 역시 상감의 손길이 닿았던 그 손목은 자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압송된 황사영은 황 심, 김한빈, 옥천희 등 동지들과 같이 국청에서 어느 교우들보다도 혹독하게 국문을 받았다.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사영이 주모자이었기에, 가장 큰 고통을 당했으나 신앙을 배반할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신앙을 고수하였다. 양력 12월 10일 한국 순교자들의 순교 성지인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황 심(도마), 김한빈(베드로), 옥천희(요한)와 또 다른 교우인 현계흠이 휘광이 내려치는 칼날아래 참수 치명하여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27세의 청년 지도자이던 황사영은 백서 작성자였기에, 다른 순교자와 달리 반역자로써 새남터에서 능지처참육시의 형을 받았다. 이로써 황사영은 순교하였거니와 그의 가산은 몰수되고, 노모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노비가 되었고 아들 경한은 나이가 어려 사형을 면했으나 추자도로 보내져 역시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실로 천주에 대한 신앙에 모든 것을 다 바쳤다 할 것이다.
황사영의 신앙과 경륜이 담겨져 있는 백서는 관가에 압수되었으나 그때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894년에 오묘한 안배에 의하여 우연히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뗄 주교(한국 이름 : 민덕효 주교)에 입수되어 교회의 품안에 들어왔다. 오늘날 이 한국인의 순교적 신앙의 증거물인 백서는 1925년 79위 한국 순교자의 복자 시복에 즈음하여 로마 교황에게 헌상되었기에 교황청 국무성 고문서관에 간직 되어 있다고 한다.

황사영은 서기 1775년(영조 51년) 남인 집안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이 소사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창원을 본관으로 하는 황사영의 집안은 10대가 벼슬을 지낸 당당한 양반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도 진사시에 그제하여, 한림학사를 지냈고, 학문이 높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황사영이 태어나기 전에 작고하였다. 학문하는 집안의 자손답게 황사영은 영특하고, 모든 친구들보다 뛰어난 재간이 있었다. 학문에 힘쓴 보람이 있어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그의 영특함이 마침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어전에 불리어 격려를 받았으며, 따뜻하게 어루만짐을 받는 성은을 입었다. 이 특은을 입은 후로 황사영은 당시의 관습대로 국왕의 손이 닿았던 손을 비단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재간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때에 관례를 치르고 ‘덕소’라는 자를 쓰게 되었다.
황사영이 천주 신앙과 맺어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1790년에 마재(오늘날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한 부락)에 사는 명문가 정씨 가문에서 부인을 맞았다. 그의 부인 정명련(마리아)은 정약현의 따님이었으며, 약현은 천학서를 연구하여 선교신부들의 가르침 없이 천주 신앙을 얻어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중심 인물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맏서형이었다. 이로부터 마재와 서울의 정씨 집안을 드나들며 동전 한문 서학서(東傳 漢文 西學書)를 접하였고, 처숙들로부터 천주 교리를 익히게 디어 마침내 천주교에 입교하여, 알렉산델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일단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로 그는 세상의 부귀 영화를 jfl고 대과에 나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를 봉행하는 생활에 몰두하였다. 이 때에 황사영은 ꡒ천주학을 시작한 다음 해에 나라에서 금령을 강화하니, 친척과 친구들이 천주교를 물리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ꡓ고 증언하였다.
그는 입교한 후 과거의 뜻을 버리고 교우집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리 서적을 필사하여 신앙지식을 더하였고, 서적을 나누어 주기에 힘썼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성직자로 영입되어 서울에 도착하여 계동 최인길(마지아)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사목 활동을 개시하자, 황사영은 주 신부를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에 최창현과는 사우(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친구),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과는 혈당(생명으로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으로의 맺음을 다하였다. 비록 그는 20여 세에 지나지 않은 젊은 몸이었으나, 그의 학식과 신앙의 뛰어남으로 한국 교회의 큰 재목으로 촉망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그를 신임하였으며, 그도 주문모 신부를 가까이 모셔 한시도 떠나기를 원치 않았으나, 주 신부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1년에 불과 서너 차례 정도 밖에 상면치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마음 아파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자기 집으로 주 신부를 모셔 미사성제를 드리고 성사받기에 힘썼다.
1801년 초부터 신유박해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검거되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한국 교회가 겪게 된 최초의 국가적 규모의 전국적인 박해였다. 전국을 휩쓰는 검거 선풍 가운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황사영의 이른바 사우, 혈당 등 한국 교회의 지도적 교우들이 모두 순교하게 되었으며, 한국 교회가 모시고 있던 오직 한 분의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도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의 씨를 말리고자 달려든 박해 당국자의 광란 속에 한국 교회는 누란의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표적 신자로서 교우 사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졌던 황사영이었기에, 그에게도 박해 당국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박해의 추이를 보기 위해 일단 집을 벗어나 계동 어느 군사의 집과 삼청동 산 속에서 수일을 지내다가 동대문 밖 송재기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환난 중에서도 침착하게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전후 대책을 취해 오던 황사영은 김한빈(베드로)과 같이 서울을 벗어나 깊은 두메골 교우촌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양반 상제를 가장하고 상복을 입고 피신의 길응ㄹ 재촉하여 예천 땅을 거쳐 제천 땅 깊숙한 산골 마을인 배론(오늘날의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한 마을)으로 찾아가 교우 김귀동의 옹기가마 토굴 속에 은신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휴양차 내려온 ‘이상주’라 일컬으며 숨어 있으면서도 교회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김한빈을 서울로 올려 보낸 서울에서의 박해와 교회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조선 교회가 모시고 있던 단 한분의 성직자를 새남터에서 잃고, 지도적 교우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으며 많은 교우들이 처참한 박해에 학살되고 가장과 가족을 잃고 노상에 헤매는 교우들의 참상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의 가슴은 메어지듯이 아팠다. 또한 풍지박산에 가까운 상태의 위기에 몰린 조선 교회를 생각하고 비탄에 젖었다.
이러한 아픔과 비탄 속에서 그는 북경 교회에 한국 교회의 고난을 알리고 원조를 받아 교회를 다시 소생시키고 천주의 신앙을 편안하게 같이 나눌 수 있는 복지를 이루어야겠다는 사명 의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어두컴컴하고 불편한 토굴 속에서 이러한 그의 구상을 담은 편지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는 이 편지가 반드시 북경 주교에 전달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밀사가 옷 속에 꿰매어 감출 수 있도록 하늘하늘한 명주천에다 쌀알만한 잔글씨로 썼다. 1백 21행 1만 3천자에 이르는 장문의 황사영의 백서는 종이에 쓰이지 않았기에 주목을 끄는 것이 아니라, 황사영의 간절한 소망과 세계적 경륜, 그리고 뜨거운 신앙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에 종교적으로 뜻있는 편지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그가 기도하듯이, 피를 토하듯이, 정성과 열정을 다하여 작성한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올리는 서한이었다. 작성자는 황사영이나 백서에는 ‘다묵’이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묵은 그의 동지의 한 사람인 황 심(도마)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황 심이 그간 몇 차례에 걸쳐 주문모 신부의 밀사로 북경 교회를 내왕하였고 북경에서 영세한 사람이기에 북경 교회 성직자들과 안면이 있어서 백서의 신빙성을 더하고 북경 교회 성직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백서의 문장은 당당하고 정성스러웠다. 그는 먼저 이 서한을 올리게 된 사정을 말하고 금번의 박해로 말미암아 겪게 된 한국 교회의 고난의 사실을 순교자의 사적을 열전 형식으로 기술하면서 적었는데, 그 순교사적 기록의 태도는 매우 엄정하다. 순교자 개인별로 그가 직접 견문하거나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만을 상세하게 북경 주교에게 보고하고 있다.
또한, 주문모 신부 자수의 사정과 순교의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러한 참상을 기록하고 난 후에 차분하게 한국 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한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첫째는 북경 교회와 한국 교회의 비밀 연락을 위한 제안이고, 둘째는 한국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제기했으며, 셋째로 한국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 세 가지를 제시했다. 즉, 교황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방책, 청나라 정치권에 의한 개입의 방책과 서양 군사력 동원에 의한 방책을 건의하였다. 외세의 침략을 자극할 위험성이 있는 문제이나 그것은 오로지 신앙 자유 구현을 위한 일념에서 제기된 것이지, 박해 당국자가 소리 높여 비난하는 바와 같은 정치적 의도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대외 봉쇄의 쇄국사회에서 자라난 한 학자 교우의 세계 경륜과 신앙 열의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 백서는 황사영이 배론에 은거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배론으로 찾아 온 황 심이 부연사행의 말몰이꾼으로 자주 북경을 내왕하는 교우 옥천희와 연락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밀송하기로 합의하였다. 옥천희는 주문모 신부와 황 심의 주선으로 북경교회를 거듭 방문한 일이 있는 교우였다. 그러나 이때에 옥천희가 1801년 말에 북경에 사행을 따라 들어가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귀국하다가 본국에서 박해가 벌어져 교회가 큰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국경에서 접하고 다시 만주에 들어가 중국 교회측에 이 사실을 급고하고 귀국하다가 불행하게도 1801년 초가을에 국경에서 체포되어 황사영의 웅대하고도 착실한 교회 부흥책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황사영, 황 심 등의 순교를 초래하게 되었다.
체포된 옥천희는 황 심과의 관계를 실토하니 황 심이 양력 11월 1일에 서울에서 검거당했다. 황 심은 포도청에서 최조받는 가운데 박해 당국이 도피한 황사영 체포에 혈안이 되어 전국을 수색하며 그로 인한 교우들의 희생이 너무 큰 것을 알았다. 이에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고 박해를 끝내기 위해 마침내 동지인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이리하여 포졸들이 배론을 급습하여, 황사영을 검거케 되었다.
그가 체포되면서 그의 심혈의 희망이 담겨졌던 백서가 당국에 압수되었다. 또한 황사영을 시종하던 김한빈도 같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양력 11월 5일).
황사영은 평소 자기 주변 교우들에게 일이 극단에 이르면 자기를 밀고하라는 말을 해 왔던 터인지라 포졸이 은신처로 몰려와 그를 체포할 때 놀라거나 동요치 않았다. 다만 나랏님이 잡아 주셨던 손목을 비단으로 감고 다녔는데 포졸들에게 이 손목만은 만지지 말라고 타일렀고 포졸들 역시 상감의 손길이 닿았던 그 손목은 자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압송된 황사영은 황 심, 김한빈, 옥천희 등 동지들과 같이 국청에서 어느 교우들보다도 혹독하게 국문을 받았다.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도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사영이 주모자이었기에, 가장 큰 고통을 당했으나 신앙을 배반할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신앙을 고수하였다. 양력 12월 10일 한국 순교자들의 순교 성지인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황 심(도마), 김한빈(베드로), 옥천희(요한)와 또 다른 교우인 현계흠이 휘광이 내려치는 칼날아래 참수 치명하여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27세의 청년 지도자이던 황사영은 백서 작성자였기에, 다른 순교자와 달리 반역자로써 새남터에서 능지처참육시의 형을 받았다. 이로써 황사영은 순교하였거니와 그의 가산은 몰수되고, 노모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노비가 되었고 아들 경한은 나이가 어려 사형을 면했으나 추자도로 보내져 역시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실로 천주에 대한 신앙에 모든 것을 다 바쳤다 할 것이다.
황사영의 신앙과 경륜이 담겨져 있는 백서는 관가에 압수되었으나 그때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894년에 오묘한 안배에 의하여 우연히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뗄 주교(한국 이름 : 민덕효 주교)에 입수되어 교회의 품안에 들어왔다. 오늘날 이 한국인의 순교적 신앙의 증거물인 백서는 1925년 79위 한국 순교자의 복자 시복에 즈음하여 로마 교황에게 헌상되었기에 교황청 국무성 고문서관에 간직 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