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계흠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장과정이나 입교과정, 그리고 집안사정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여러 교우들과 상호 연락을 취하면서 교회의 일을 보살피는 데 열성적이었으며, 특히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에 깊이 관계했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 교난(己亥敎難)과 1846년의 병오 교난(丙午敎難) 때 각각 순교한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타와 현석문(玄錫文) 까롤로가 그의 자녀들로 뛰어난 신앙심과 열성을 보임으로써 마침내 성인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된 사실은 바로 현계흠의 신앙심이 면면히 이어져 형성된 것이라 할 것이다.
현계흠은 중인계급에 속하는 역관 집안 출신으로 서울 장흥동(長興洞)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을 「사수」라고도 하였다. 또한 어떤 기록에는 그가 약포(藥舖)를 경영했던 것으로도 나타난다. 1797년(正祖 21)에는 동래(東萊)의 용당포(龍塘浦)에 얼마동안 정박하였던 영국 함선에 올라가 본 후, 그와같은 배 한척만 있어도 조선의 전함 백척 이상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여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1800년 무렵부터 황사영, 황 심(黃沁), 김한빈(金漢彬), 옥천희(玉千禧) 등과 친밀히 지내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던 그는 이듬해 신유 교난(辛酉敎難)을 당하여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박해를 피하여 지방으로 도망하였던 현계흠은 자신의 도피로 인하여 여러 일가친척들이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전하여 들은 후, 곧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리들은 이미 그가 천주교인으로서 황사영이 꾸민 음모에 깊게 관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의금부로 압송된 그는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굳건한 용기로 신앙을 증거하며 누구를 고발하거나 신앙심에 위배되는 말을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형선고를 받고 황사영, 옥천희와 함께 참수를 당하여 순교에 이르니, 때는 1801년 12월 10일(陰, 11월 5일)이요,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현계흠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장과정이나 입교과정, 그리고 집안사정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여러 교우들과 상호 연락을 취하면서 교회의 일을 보살피는 데 열성적이었으며, 특히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에 깊이 관계했다는 기록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 교난(己亥敎難)과 1846년의 병오 교난(丙午敎難) 때 각각 순교한 현경련(玄敬連) 베네딕타와 현석문(玄錫文) 까롤로가 그의 자녀들로 뛰어난 신앙심과 열성을 보임으로써 마침내 성인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된 사실은 바로 현계흠의 신앙심이 면면히 이어져 형성된 것이라 할 것이다.
현계흠은 중인계급에 속하는 역관 집안 출신으로 서울 장흥동(長興洞)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을 「사수」라고도 하였다. 또한 어떤 기록에는 그가 약포(藥舖)를 경영했던 것으로도 나타난다. 1797년(正祖 21)에는 동래(東萊)의 용당포(龍塘浦)에 얼마동안 정박하였던 영국 함선에 올라가 본 후, 그와같은 배 한척만 있어도 조선의 전함 백척 이상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여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1800년 무렵부터 황사영, 황 심(黃沁), 김한빈(金漢彬), 옥천희(玉千禧) 등과 친밀히 지내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던 그는 이듬해 신유 교난(辛酉敎難)을 당하여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박해를 피하여 지방으로 도망하였던 현계흠은 자신의 도피로 인하여 여러 일가친척들이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전하여 들은 후, 곧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리들은 이미 그가 천주교인으로서 황사영이 꾸민 음모에 깊게 관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의금부로 압송된 그는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굳건한 용기로 신앙을 증거하며 누구를 고발하거나 신앙심에 위배되는 말을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사형선고를 받고 황사영, 옥천희와 함께 참수를 당하여 순교에 이르니, 때는 1801년 12월 10일(陰, 11월 5일)이요, 그의 나이는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