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심( 시몬 )

 

  「계완(啓完)」이라고도 불리었던 김백심(그의 漢字名을 百深이라 적은 기록도 있다) 시몬은 서울 서소문 밖에 살던 양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때 행적이나 집안환경에 대하여는 어느 문헌에도 나타나 있지 않는다. 그러나 문초기록(問招記錄)에서 볼 때 그는 1791년(正祖 15)에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로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들은 후 즉시 이에 입교하여 열심히 교리를 봉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최창현(崔昌顯), 정약종(丁若鍾), 이합규, 이희영(李喜英) 등의 교우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교회의 일을 돌보았으며, 여러 남녀 교우들과 함께 모여 천주교 서적을 공부함으로써 신앙심을 굳혀 나갔다. 그러던 중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정약종의 집에 머무르게 되자 그 집에 수차례나 왕래하며 신부로부터 강론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신부를 모시면서 여러 가지로 보살펴 드리며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신앙을 더욱 굳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을 수가 있었다.


  1801년에 신유교난의 박해로 교우들이 각처에서 체포당하고, 자신도 그 대상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몬은 교우들과 함께 이곳 저곳으로 피해다니며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 강완숙(姜完淑)의 인도로 황사영(黃嗣永), 이합규 등과 함께 여교우 김연이(金連伊)의 집으로 일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여러 교우들의 집으로 옮겨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숨어서 생활하던 중 그는 부친이 자기 대신으로 포청에 갇혔다는 소식과 함께 가족들도 몹시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소식을 확실히 알기 위하여 한성호(韓聖浩)의 집으로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포청으로 압송된 시몬은 즉시 포장으로부터 신문과 문초를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증거하기에만 열심이었다. 이때 가족들이 그를 석방하여 달라고 몰래 갖다준 돈을 받은 포장은 일시적으로 그를 석방하여 주었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후 포장은 다시 시몬을 불러다 놓고, ꡒ이제 마음이 변했느냐? 다시는 그 사악한 종교를 믿지 않겠지?ꡓ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ꡒ저는 전보다 더욱 천주교를 열성적으로 신봉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ꡓ라고 답하여 자신의 신앙심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밝힐 뿐이었다. 포장은 화가 나서 그를 여러 차례 신문하고 형벌을 가하여 배교와 밀고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나약한 표시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후 형조로 이송된 그는 포청에서와 같은 신문과 형벌을 받고는 사형으로 결안(結案)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함에 이르렀으니, 때는 1802년 1월 29일(陰,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