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교회-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

 



  2-6.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




  동.서 교회는 9세기 포시우스로 인해 한때 분열되었다.  그는 858년 평신도로서 일약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엇다.  그는 황제 니꼴라오1세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착좌(着座)사실을 알렸고 미키엘3세는 아직 비잔틴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성화상 피괴 운동을 단죄하기 위하여 개최하는 공의회에 교황 특사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816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교황특사들은 교황과 사전 의논 없이 포시우스를 합법적인 총대주교로 승인하였다.  이에 교황은 포시우스의 선출을 위법으로 규정하였지만 이 결정은 동로마제국에 의해 무시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교황이 비잔틴교회에 부당하게 내정간섭을 하였다는 적의적 감정이 폭발하였다.  이로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분규가 공개화되기 시작하였다.




  불가링에서 로마 성직자들이 니체아 신경에 ‘성자로부터’란 단어를 첨부하여 사용하였다.  867년에 포시우스 ‘성자로부터’를 이단 교리로 배척하였고 교황을 이단자라고 하며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후 포시우스의 단죄와 복직 등으로 긴장관계가 완화되었고 교황 요한8세는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을 내세우기 위한 의도에서 포시우스를 승인하고자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가 개최(879-880)되어 포시우스에 대한 과거의 단죄를 무효화하고 그를 합법적 총대주교로 승인하였으나 ‘성지로부터’의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호 몰이해, 상호 불관용, 관할권 논쟁 등의 문제와  함께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합의하지 못한 교황의 수위권과 ‘성자로부터’교리문제는 두 교회가 결별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간 교황은 남부 이탈리이에서 노르만족과 사라센에 대항하고자 비잔틴과 제휴를 시도했었는데 그것이 레오8세 교황 때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체톨라리우스는 그의 관할 지역인 남부이탈리아에 교황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 분규를 일으킴으로써 비잔친제국과 교황청의 상호 이해관계 조성을 저지하였다. 


  이러한 분규가 일어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 교황청이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전례 교회에서 라틴전례로 통일하고자 하였고, 반면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그의 관할 지역에 있는 라틴전례의 성당에서 비찬틴전례를 사용하도록 조처를 취하여 미사성제에서 누룩없는 빵의 이용을 금지하였고, 신조에 ‘성자로부터’란 단어를 삽입하여 사용하는 것을 단죄하였다.




  둘째, 로마 교황청은 교회개혁 의지를 갖고서 전 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였고 비잔틴교회는 전통적 가치권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영향력있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9세 교황은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훔 베르토 추기경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다.


  사절단을 고압적인 자세로 총대주교를 대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헌납서’와 사도전승에 의한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는 총재구교에게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토록 강요하면서 서방교회의 관습이 유효하고 전승에 맞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협상이 결렬되도록 유도하였고 사절단의 주장을 받아이들이 않았다.




  한편 훔 베르토 추기경도 성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신중한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 성당의 제대 위에 미리 작성한 총대주교와 그의추종자들에 대한 파문 칙서를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 칙서를 놓고 로마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파문서는 콘스탄티누스9세 황제의 명령으로 소각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교회회의는 훔베르토와 그의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 교회는 결별하였고, 그리스도교 세계는 양분되었다. 이 불행한 사건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훔베르토 추기경이 월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왜나햐면 총대주교의 파문이 선포되었을 때는 이미 4월 19일 레오9세 교황은 사망하였고 12월 4일에 후계자로 아드리아노4세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 일부 비잔틴교회가 되돌아오고 1965년 양교회가 서로 파문을 폐지함을 선언했지만 이것으로 완전한 일치가 회복된 것은 아니고 다만 재결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1054-1300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과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교회 쇄신을 위한 노력으로 교회가 자주권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속권을 지해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 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 운동에서 나타나게 된다. 십자군 운동은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심에서 우러난, 성지 예루살렘의 회복에 목적을 둔 가톨릭의 공동 사업이었지만 이로 인한 영향은 대단하였다. 


즉 당시 교회의 권위와 세속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우월권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십자군 운동은 신앙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변화를 초래하는 큰 자극제가 되어 유럽 사회의 변질을 가져왔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