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세교회- 십자군 운동

 

  2-9.  십자군 운동




  2-9-1.  배경




  십자군 운동은 서방의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방의 이슬람 세계와의 대립이 낳은 서양 중세 최대의 사건이다.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는 데에는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당시 유럽의 각 군주는 물론 제후, 기사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그런데 당시 군대와 기사 계급들에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정신이 도입되어 교회와 압박받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력도 사용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1060년 이후로 프랑스 가사들에게 널리 퍼저 있었고, 이들은 교회의 적과의 투쟁을 성전(聖戰)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정신 하에 당시의 유럽의 군주, 제후, 기사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당시 동방 무역을 독점하던 사라센들의 물질적 활대에 대한 시기와 욕망이 있었으므로 단순한 그리스도교 정신 이면에는 영토 확장과 물질적 욕망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오래 전부터 싱지 예루살렘 순례는 하나의 습관이었고 또한 열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성지 순례로 신자들이 다른 모습 보속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무력 사용을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과거에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적대세력에 대항하여 군대를 소집하던 임무와 권한이 교회로 이관됨으로써 교회는 전쟁을 수행하는 새로운 핵심 세력이 되었다.  이에 로마 교황은 서유럽세게의 평화를 파괴하는 적을 제거하기 위한, 성전을 포고(佈告)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2-9-2.  과정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4세가 이슬람에게 패전한 이후 점차 소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이 이슬람에 속하게 되었다.  이슬람들은 처음에는 순례자들에게 관대하게 대했으나 점차 순례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신자들은 성지 순례에 제한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1090년에 이르러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서유럽 제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고 1096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교황청에 정식으로 군원(軍援)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2세는 이러한 요청을 수락, 수행함으로써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를 이룩하고자 희망하였다.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동방 교회의 보호와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고 결의하여 성지 회복의 원정군을 일으킬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096년 제1차 원정을 시작으로 하여 100여 년간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계속되었다.




  교황은 이러한 원정으로 교회와 황제, 제후 간의 대립을 종식시키고, 이교도와의 싸움에 사선을 집중시킴으로써 로마 교회의 권위와 권력을 확립하는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원조에 응함으로써 그리스 정교 세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우월을 꾀하였다.  또한 국왕과 제후와 가사들은 정체하기 시작한 봉건사회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의 필요에 응하여 원정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상인들은 동방 무역의 이익에 탐이 났고, 농민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그들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각계 각층이 서로 다른 목적을 이면에 깔고 있었다.


   하지만 불편한 교통과 원거리의 미지의 세계를 원정한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었고, 또한 생환(生還)을 기약하기 어려운 원정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세인들의 맹목적이라 할만큼 열렬한 신앙심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교황을 십자군에 대한 호소는 그리스도교 세계를 단결시켰고 더욱이 1차 십자군 운동이 성공은 당시 성직 서임권 문제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던 상황 속에서 교황의 권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군 운동을 평신도들이 그레고리오 개혁을 구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4차 원정 이후 십자군 운동이 실패함으로써 원정에 참여한 봉건 제후들의 몰락으로 교황권의 위신이 추락되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서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군주국가가 출현으로 후에 그리스도교 세계를 분열시키는 길을 마련함으로써 200여 년 간에 걸친 십자군 운동을 가톨릭과 이슬람의 충돌에 그치지 않고 정교(政敎)의 대립을 초래하고, 유럽 전체의 세력의 분해와 그 조정의 역할을 하였다. 






  2-9-3.  의의




  십자군 운동은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를 이스람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성지 수례를 보장함으로써 평신도의 신심 앙양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의 주요 순례인 예루살렘, 나자렛, 베들레헴 등은 그리스도교 신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십자군 운동에서 돌아온 군인들과, 순례에서 돌아온 신자들은 그들이 방문 또는 참패한 장소를 성서에서 다시 찾아보려고 노력하였고, 성서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발견하여 청빈한 생활로 신심을 강화함으로써 복음생활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니 결과적으로 그레고리오 개혁 정신에서 나온 또 하나의 평신도의 자세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십자군 운동에 참여한 장기간의 원점으로 인한 많은 기사들의 몰락은 영주권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지방 분권이 무너지고, 반대로 군주권의 강화됨으로 중앙 집권이 강화되는 절대군주의 출현을 낳았으며 이러헌 군주권의 강화는 주앙 집권이란 근대국가의 형성을 유발하는 국민의식도 싹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발한 동방 무역을 통해 상업이 활발해지고,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가 말달하게 됨으로써 신항로 개척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  도시의 번영은 경제적 변혁을 초래, 신흥 귀족인 신흥 자본가가 발생하였고, 자유의 정신도 일어났다. 




  문화적으로는 로마 멸망 후 3개 문화권으로 갈라져 상황이질적인 방향으로 발전되던 것이 십자군 운동으로 상황접축하게 되어 오늘의 통합된 서양 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즉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접촉하게 디고 동양 문화까지 어울려 학문과 예술의 발달을 보게 되었고, 특히 이는 스톨라 철착과 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십자군 운동은 제4차 원정부터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유도되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중세 유럽의 정치.사회.문화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던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