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가톨릭 교회(3)

 

19세기의 가톨릭 교회(3)




도전받는 교회




교황령의 붕괴 :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 1천여 년 동안 통치하던 교황령(교회 국가)은 그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1791년 프랑스에 있었던 교황령은 프랑스의 새 공화정부(제1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808년에 나폴레옹이 이딸리아 교황령을 점령하였다. 이 교황령은 나폴레옹이 패전, 실각한 후에 비인회의(1815)에서 수복되었다.


그러나 교황령은 이딸리아의 통일국가를 추구하던 민족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의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로서 교황령의 정치적 민주화 개혁을 단행하여 민족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말에 민족 진영의 극단파에 의해 교황령의 첫 수상이 의회에서 살해되고 교황은 로마를 떠나 피신하였다. 1849년에 교황은 프랑스 군주의 도움을 받아 민중 봉기를 진압하고 교황령을 되찾은 동시에 그의 자유주의적 태도를 전제적 자세로 바꿨다.


여기서 민족주의자들은 교황 중심의 이딸리아 연방국가 건설이나 교황 체제의 형성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르디니아의 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1849-1878)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예수회원들은 축출되고(편집자주: 교황의 측근이기에) 국가혼인 제도가 의무화되는 동시에 교회 법정은 폐쇄되었다. 성직자의 특권이 취소되었고 관상 수도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피에몬테의 수상인 가밀로 가부르(1852-1861)는 1858년 7월 이딸리아의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1848-1870)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여 1859년에 롬바르디아를 획득하였다. 교황령을 보호해 주던 오스트리아가 철수하자 여러 곳에서 혁명이 일어나 교황 통치가 끝나고 피에몬테와 사르디니아가 통합,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딸리아 민족주의의 영웅인 지우제페 가리발디는 반교회적 인물로서 1860년에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고 같은 해 9월 18일에는 라모리씨에르 장군 휘하의 교황 군대를 굴복시켰다. 마침내 1861년 3월에 이딸리아 왕국이 창설되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은 왕이 되었다.


이제 교황령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로마만이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교황령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1870년에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에서 철수하자 피에몬테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9월 20일) 교황령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바티칸 궁으로 물러난 비오 9세는 침략자들에게 엄중하게 항의하고 파문하였으나 허사였다.


1871년 5월 13일에 이딸리아 왕국의 새 정부는 소위 ꡐ보호법ꡑ을 공포하여 교황청 문제를 일단락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오 9세는 이 법을 거부하였고 교황청과 이딸리아 정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교황은 1874년에 칙서를 통해서 현 정부가 시행하는 선거를 거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처는 결국 선의의 가톨릭 정치인의 현실 참여를 막아 반교회적 과격파가 정권을 장악케 하였다. 이 문제는 후에(1929년 2월 11일) 무쏠리니와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독일제국의 문화투쟁 : 1701년에 설립된 프로이센 왕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활기에 넘친 교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수상인 비스마르크의 등장과 아울러 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1866)와 프랑스(1870)와의 전쟁에서 승리, 그리고 독일제국의 탄생(1871) 이후로 교회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특히 보불전쟁의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교황에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의 무장해제에 있어서 프랑스 성직자들의 협조를 촉구하도록 요청하였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제국의 건설과정에서 독립주의를 주장하는 바바리아의 가톨릭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반발을 무마하도록 부탁하였으나 교황은 모두 거절하였다. 이것이 신생 독일제국과 교황청이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은 헤겔(1770-1831)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반교회적 분위기에 휩싸였고 옛 프로이센 국교의 부활이 시도되었다. 더우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을 정의, 선포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국가에 위험한 존재로 오인되거나 압력 단체로 간주될 수 있었다.


한편, 1852년에 프로이센 의회에서 주로 가톨릭 교회 신도로 구성, 결성된 중앙당이 1871년 3월 선거로 독일제국의 의회에서도 주요 세력으로 등장, 제국 안에서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을 미리 배제하고자 ꡒ종교의 자유가 새 제국 헌법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ꡓ고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반성직자주의의 성격을 띤 국민자유당과 프로이센의 종교교육상인 아달베르트 팔크(1827-1900)의 지지를 얻고 중앙당과 투쟁하고자 하였다.


독일제국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1873년에 루돌프 위르코브는 이러한 반가톨릭 운동을 소위 ꡐ문화투쟁ꡑ이라고 불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은 1871년 7월 8일에 종교교육성의 가톨릭 사무국이 폐쇄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바바리아의 수상인 요한 루츠는 고가톨릭파를 공격하던 가톨릭 성직자들의 설교를 봉쇄하기 위하여 ꡐ설교단법ꡑ을 형법에 삽입하였다.


1872년 3월에 프로이센에서는 1850년의 헌법에 보장된 성직자의 초등교육 감독권을 국가기관으로 이관하는 법을 제정, 시행하였고 이 법은 6월에 더욱 확대되어 수도단체의 교육 활동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뿐 아니라 1872년 7월 4일에는 ꡐ예수회 금지법ꡑ의 의회 통과로 예수회의 수도원이 폐쇄되어 그 회원들은 축출되었다. 다음 해에는 이 법이 다른 수도회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1873년 5월 팔크는 본격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법(5월법 또는 팔크법)을 제정하고 두 차례에 걸쳐(1874, 1875) 더욱 가혹한 법으로 개정하였다.


수도원은 해체되었고 신학교 운영과 성직자의 임명 등 교회 문제가 국가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5월법에 불복하는 성직자는 법적 제재(벌금, 투옥, 추방)를 받게 되었다. 1875년 2월에 정부는 국가혼인을 의무화하였고 4월에는 ꡐ빵 바구니 법ꡑ을 통과시켜 이상의 법들에 불복하는 교구는 교회 특권을 박탈하는 조취를 취하였다. 따라서 1878년경에는 프로이센의 12개 교구 주에 4개 교구만이 남았다.


이러한 반가톨릭적 법령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가톨릭 교인들은 교황과 주교들에게 더욱 충성하였고, 투쟁하는 동안에 가톨릭 교회의 세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중앙당은 매선거에서 승리하였고, 비스마르크의 지지 세력인 국민자유당은 쇠퇴하였다. 더우기 국가 위신에 대한 실추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의 성장은 비스마르크에게 정책 전환을 하게 하였다. 새 교황인 레오 13세(1878-1903)의 선출로 양 세력 간의 평화 무드가 조성되어 각종 금지법이 차례로 폐기되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저항에 무릎을 꿇고, 가톨릭 교회의 승리로 문화투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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