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淸貧) 운동과 이단(異端) 논쟁

 

청빈(淸貧) 운동과 이단(異端) 논쟁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사회에서 중세도시가 발달하게 된다.  도시에는 상인과 함께 상품을 공급하는 수공업자 직업인이  상주하였는데 이들을 부르주아라 불리웠다.  이 도시민들은 상인조합과 공인조합을 조직하여 상호 단합과 경제적 이득을 도모하고, 꾸준한 노력과 투쟁을 통하여 지방 봉건귀족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여 중세사회에서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강력한 사회 세력을 형성하여 봉건 체제를 약화시켰고 시민 계급의 영향력은 모든 분야에서 강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교회의 평신도들도 자각하여 좋교 문제에 개입,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더욱이 그레고리오 개혁에 의해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교 신심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개인 성화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서구 세계가 동방교회의 수도원과 접촉하는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청빈 생활에 대한 구체적 모습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순회 설교가들의 강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을 활성화 하였고 평신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염원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담겨져 있는 성서에 관심을 갖고 성서 모임을 조직하여 성서를 읽고 해설하였다. 이들은 성서에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도적 생활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기를 갈망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평신도들은 도시민이 조합을 구성하듯이 신심단체를 구성하여 개인의 성화와 이웃에 대한 봉사를 위해 노력하였다.  도시에 이러한 평신도의 청빈 운동은 부유한 교회의 봉건 체제에 반발하여 과격한 양상을 보이며 교회와 성직자를 공격하였고 성사를 거부하는 이단 운동을 전개하였다.


  1175년 경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 발도에 의해 시작된 발도파는 ‘리웅의 가난한 사람들’로 자칭하며 절대적 가난 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발도파는 복음적 가난만이 아니고 성사만을 인정하고 미사, 고해, 성인공경, 연옥 등을 부정하며 평신도 사제직을 주장하는 등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리옹이 주교로부터 설교를 금지당하고 교황으로부터 파문되었다.  그들은 지하에 숨어 투쟁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나머지는 종교 분열 때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다.  실제로 발도파는 그 교리에 있어 프로테스탄티즘의 개척자 구실을 하였다.




  또한 십자군 운동에 참여한 군인들과 상인들을 통해 이원론적 이단 사상이 서구에 도입되었는데, 카타리라고 불리던 이단자들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재산을 소유한 가톨릭 교회와 모든 재산을 포기한 카타리의 청빈교회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고행과 극기의 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이상적 그리스도인으로 선언하고 가톨릭교회는 사탄의 집회이고 성직자는 위선적 죄인이며 성사는 악마의 장난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그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베르나르도와 도미니꼬와 같은 성인들을 보내 설교케 했고, 교황사절을 파견했지만 교황사절마저 살해하므로 부득히 무력에 호소하게 되어 1209년부터 20여 년 간 알비전쟁이 있게 되었다.




  이단은 비단 교회에서만이 아니고 사회와 국가에서도  위험한  존재였다. 


특히 카타리파와 같은 것은 교회와 국가의 존재를 동시에 위험했다. 그러므로 종교와 정치가 밀접히 결합되어 있던 국가와 교회는 이단에 공동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먼저 국가에서는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한편 교회는 카타리파와 발도파를 단죄했으나 효가가 없자 주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이단을 다스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주교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레고리오9세는 이단을 색출하고 심문할 교황 직속 이단 심문소를 설치하였다.  동시에 도미니꼬 회원을 심문관으로 임명하여 이단 심문과 그 운영을 담당케 하였으며 중죄자는 속권에 넘겨 처형케 하였다.




  이로서 ‘종교재판’으로 불리는 저 유명한 이단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는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이고 어두운 장의 하나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당시에 신학자들이 신앙문제에 있어서 폭력 사용을 배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는 중교의 이단자를 정치적 반란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불행한 결과는 및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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