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진길(아우구스띠노, 1791-1839)
유복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유 진길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학문에 관심이 깊어 청년 시절을 세속적 명예 추구나 쾌락 향유보다 진리 탐구로 보냈다. 그는 인생의 목적과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10여년 동안 불교와 도교에 관한 저서 또는 유교의 경전등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였으나 그가 찾고자 하는 진리를 만족하게 발견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즈음에 유 진길은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인사들이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처형되는데도 죽는 순간까지 기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기서 그는 천주교인들이 목숨까지 내놓는 천주학에 참된 진리가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때부터 유 진길은 천주교 신자를 만나거나 적어도 천주교 서적을 구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그것은 국가의 금교령 때문에 신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숨어 다녔고 천주교 서적은 박해로 거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유 진길은 자기 집의 장롱에 붙여놓은 종이 조각에서 「천주실의」의 일부를 발견하고 뜯어내어 읽으면서 인생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천주교 저서에서 찾아보려는 열망이 더욱 강하게 일었다.
1823년에 유 진길은 북경에 파견되는 조선 왕국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서 북경에 드나들다가 하인으로 사절단에 끼어 다니던 정 하상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 천주교에 있어서 성직자가 입국하는 데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유 진길은 당시에 역관 직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장애없이 북경에 쉽게 왕래할 수 있었고 직책상 동료들을 많이 포섭할 수 있는 영향력도 갖고 있었다. 이제 그는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서를 구하고자 갈망하던 소원이 성취되었고, 그에게 의심으로 남아 있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1824년, 유 진길은 정 하상과 함께 처음으로 북경 교회를 찾아가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세례를 청하여 아우구스띠노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영세한 후에 정 하상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가담하여 매년 사절단의 북경 왕래를 통해 북경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모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북경 교회에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할 뿐 아니라, 조선 교회 전체 신도들의 이름으로 직접 로마 교황에게 청원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교구(대목구)가 설정되었고 성직자가 입국할 수 있었다.
1839년 6월 7일(음력)에 유 진길은 밀고자에 의해서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유 진길에게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는 자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할 뿐이었다. 친지들이 다시 유씨 가문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자 유 진길은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괴로우며 당신들의 처지를 동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안 뒤에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골육의 사정을 돌보는 일보다 먼저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오늘날 잃을까봐 겁내는 것을 경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포청에 가서도 포장이 친절하게 대우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였고, 그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족과 친척들이 당할 어려움도 설명하였으나, 유 진길은 신앙에 있어서 조그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결박당하여 문초받는 신세가 되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받았다. 이어서 포장은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갖가지 모함을 늘어놓으며 그에게 이들이 조선에 입국한 동기를 설명하도록 요구하였다. 유 진길은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온 목적은 오직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천주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을 공경하고, 자기들의 영혼을 구하도록 가르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그분들이 명예와 재물, 그리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의 조국과 풍요로운 서양을 떠나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에 오겠읍니까?”라고 성직자들을 변호하였다.
1839년 9월 22일(음력)에 유 진길은 국법을 어기고 외국 선교사를 입국시켰다는 반역 죄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치명하는 순간에 묵상에 깊이 빠져 이미 현세 사물에는 조금도 구애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유 진길은 참수형으로 48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아울러 그의 아들 유 대철(베드로)은 아버지를 따라 관가에 자수하여 9월 15일(음력)에 순교하였다. 이 13세의 소년은 한국 천주교의 순교사에 있어서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가 되었다.

유 진길(아우구스띠노, 1791-1839)
유복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유 진길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학문에 관심이 깊어 청년 시절을 세속적 명예 추구나 쾌락 향유보다 진리 탐구로 보냈다. 그는 인생의 목적과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10여년 동안 불교와 도교에 관한 저서 또는 유교의 경전등 수많은 책들을 탐독하였으나 그가 찾고자 하는 진리를 만족하게 발견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즈음에 유 진길은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인사들이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처형되는데도 죽는 순간까지 기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기서 그는 천주교인들이 목숨까지 내놓는 천주학에 참된 진리가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때부터 유 진길은 천주교 신자를 만나거나 적어도 천주교 서적을 구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그것은 국가의 금교령 때문에 신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숨어 다녔고 천주교 서적은 박해로 거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유 진길은 자기 집의 장롱에 붙여놓은 종이 조각에서 「천주실의」의 일부를 발견하고 뜯어내어 읽으면서 인생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천주교 저서에서 찾아보려는 열망이 더욱 강하게 일었다.
1823년에 유 진길은 북경에 파견되는 조선 왕국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서 북경에 드나들다가 하인으로 사절단에 끼어 다니던 정 하상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 천주교에 있어서 성직자가 입국하는 데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유 진길은 당시에 역관 직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장애없이 북경에 쉽게 왕래할 수 있었고 직책상 동료들을 많이 포섭할 수 있는 영향력도 갖고 있었다. 이제 그는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서를 구하고자 갈망하던 소원이 성취되었고, 그에게 의심으로 남아 있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1824년, 유 진길은 정 하상과 함께 처음으로 북경 교회를 찾아가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세례를 청하여 아우구스띠노라는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영세한 후에 정 하상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가담하여 매년 사절단의 북경 왕래를 통해 북경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모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북경 교회에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할 뿐 아니라, 조선 교회 전체 신도들의 이름으로 직접 로마 교황에게 청원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선교구(대목구)가 설정되었고 성직자가 입국할 수 있었다.
1839년 6월 7일(음력)에 유 진길은 밀고자에 의해서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유 진길에게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는 자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할 뿐이었다. 친지들이 다시 유씨 가문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자 유 진길은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괴로우며 당신들의 처지를 동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안 뒤에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 골육의 사정을 돌보는 일보다 먼저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오늘날 잃을까봐 겁내는 것을 경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포청에 가서도 포장이 친절하게 대우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였고, 그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족과 친척들이 당할 어려움도 설명하였으나, 유 진길은 신앙에 있어서 조그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결박당하여 문초받는 신세가 되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받았다. 이어서 포장은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갖가지 모함을 늘어놓으며 그에게 이들이 조선에 입국한 동기를 설명하도록 요구하였다. 유 진길은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온 목적은 오직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천주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을 공경하고, 자기들의 영혼을 구하도록 가르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그분들이 명예와 재물, 그리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의 조국과 풍요로운 서양을 떠나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에 오겠읍니까?”라고 성직자들을 변호하였다.
1839년 9월 22일(음력)에 유 진길은 국법을 어기고 외국 선교사를 입국시켰다는 반역 죄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치명하는 순간에 묵상에 깊이 빠져 이미 현세 사물에는 조금도 구애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유 진길은 참수형으로 48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아울러 그의 아들 유 대철(베드로)은 아버지를 따라 관가에 자수하여 9월 15일(음력)에 순교하였다. 이 13세의 소년은 한국 천주교의 순교사에 있어서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