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신철(까롤로, 1795-1839)
강원도 회양 지방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조 신철은 다섯 살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몇 년 후에 그의 부친이 가산을 탕진하자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환속하여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서 머슴살이로 지내다가 23세에 이르러 북경을 왕래하는 사절단의 마부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정직하고 사심이 없는 성격으로 동료들에게 신망을 얻고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하인’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몇 년 후에 조 신철은 북경에 드나들던 정 하상과 유 진길을 만나 친교를 맺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성직자 영입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북경 교회와 자주 연락을 취하여야 한다고 믿고 여기에 필요한 협조자로 하인들 중에서 신원이 확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중이었다.
1825년경에 조 신철은 유 진길에게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입교 권유를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생소한 이야기에 당황하였으나 유 진길이 며칠 동안 교리를 설명해 주자 점차로 마음의 문이 열려 신앙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조 신철은 정 하상과 유 진길에게 천주교를 신봉할 의향을 밝혀 유 진길과 함께 사절단의 일행으로 북경에 간 기회에 천주당을 방문하여 까롤로라는 영세명으로 세례와 견진을 받고 돌아왔다.
조 신철은 귀국한 후에는 더욱 겸손한 마음과 뛰어난 인내심,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갖고 신앙생활에 성실하였다.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자기 가정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교우들을 애긍 시사로 도와주는 데에 헌신하였다. 그는 천주교 입교를 거부하던 아내를 끈기 있게 권유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고 열심한 신자로 생활하다가 선종하도록 인도하였다.
1837년에 그는 최 영이(바르바라)와 재혼하였다. 조 신철은 하인이라는 미천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33년 동안 목자 없이 지낸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모시는 데에 있어 정 하상, 유 진길과 함께 크게 공헌하였다. 세 사람 중에서 그는 조선 교회와 북경 교회를 연락하는 책임을 맡고 서신 전달과 선교사 안내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모방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신부의 지방 순회에 동행하면서 복사와 통역을 담당하여 사목 활동에 협조하였다. 이러한 교회 활동에 헌신하면서 조 신철은 항상 순교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목숨을 바치고 갖은 고통을 당하여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겠읍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순교할 마음 준비를 갖추고 그의 아내에게도 “이제 우리 하느님을 위해 순교합시다”라고 다짐하였다.
1839년 7월(음력)에 포졸들이 조 신철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마침 외출하였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자기 가족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구경꾼들 사이에 끼여 형조로 가서 자헌하였다. 투옥된 다음날부터 그는 여덟 차례에 걸쳐 주뢰와 줄톱질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직 체포되지 않은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의 은신처와 교우들의 명단을 밝히기를 거부하였다. 후에 두 신부들이 자수, 체포되었을 때에 그들과 함께 조 신철은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어 3일 동안 문조를 받고 세 차례에 걸쳐 곤장을 수없이 맞고 8월 15일(음력)에 형조로 옮겨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나흘 후인 8월 19일(음력)에 조 신철은 함거(檻車)에 올라 사형장으로 떠나기 전에 한 옥졸에게 “내가 먼저 천국으로 가니 나의 가족들에게 용기를 내어 나를 꼭 따라오라고 전해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개선하는 승리자와 같은 기쁜 표정을 짓고 기도 속에 서소문 밖에 도달하였다. 조 신철은 44세의 나이로 그가 항상 갈망하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아울러 조 신철의 소원대로 그의 아내 최 영이(바르바라)도 한양 당고개에서 12월 28일에 순교하였다. 최 영이는 중인 계급의 열심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부친은 신유대박해 중에 순교한 서울 총회장 최 창현(요한, 1795-1801)의 동생이었다.
최 영이는 20세에 조 신철과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체포될 때에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감옥에 들어왔다. 그는 어린 자식 때문에 신앙의 위기를 여러 차례 느껴 젖먹이 아들을 친척집에 보내는 모성의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22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