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쉘-알렉상드르 쁘띠니꼴라(Michel-Alexandre Petitnicolas 1828-1866)
조선 입국 후에 ‘박(朴) 신부’라고 불리던 쁘띠니꼴라 신부는 1828년 8월 21일에 프랑스 생 디에 교구 관할의 꼬앵슈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구 대신학교에서 수학(修學) 중, 차부제(次副祭)로서 1850년 1월 20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9개월이 못되어 건강이 좋지 않아 의사의 지시로 교구로 돌아가 1852년 6월 5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서 본당 사목에 종사하였다. 1853년 6월 17일에 파리 외방전교회로 돌아온 그는 2개월 후에 인도의 선교사로서 프랑스를 떠났다. 그러나 쁘띠니꼴라 신부는 열대성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건강이 쇠약해져서 코임바투르라는 곳에서 휴양하면서 인도 언어를 연구하였다. 후에 그는 홍콩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뿌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로운 선교지인 조선에 부임하라는 지시를 받고 상해에 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베르뇌 주교와 동행하여 조선 왕국에 입국하였다.
쁘띠니꼴라 신부는 고된 여행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처음에는 다블뤼 보좌주교의 출판 사업을 도왔다. 1858년에 그는 건강이 회복되어 사목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는 어학에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조선어를 습득하였고 총명한 선교사로서 성무(聖務)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들을 쉽게 해결하였다. 그는 충청도 배티에 거주하면서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 산재되어 있는 77개 공소의 3천5백여 명의 교우들을 보살폈다. 또한 그는 어느 정도 의학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병자 교우들에게 약을 처방해 주어 어떤 이들은 생명까지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1859년에 이르러 그는 성무를 집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건강이 약화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그를 충청도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에 보내어 뿌르티에 신부의 신학생 교육과 어학 연구를 돕도록 지시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쁘띠니꼴라 신부는 선교사 생활 중에서 항상 병고와 투쟁하는 고통을 받았지만 강한 의지로써 병약한 육체를 지탱하면서 자기 임무에 열정적으로 헌신한 성직자였다고 한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3월 7일에 쁘띠니꼴라 신부는 뿌르티에 신부와 함께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2월 28일에 브르뜨니애르 신부로부터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갑작스러운 박해가 믿어지지 않아 피신하지 않고 사태의 진전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양에서 승지 남 종삼(요한)을 체포하기 위해 파견된 포졸들이 3월 2일에 배론에서 3㎞ 떨어진 주막에서 쉬던 중에 근처에 서양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방 포졸들을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곧 선교사 체포를 계획하고 길에서 여교우를 붙잡아 그들을 앞장세워 배론 신학교를 급습하였다. 쁘띠니꼴라 신부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와병(臥病) 중이던 뿌르티에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성직자는 3월 3일에 배론을 떠나 5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포도청에 송치된 날에 쁘띠니꼴라 신부는 두 차례에 걸쳐 고문과 신문을 받고 다음날(3월 8일)에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11일에 뿌르티에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