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성(聖) 마르꼬 정의배(丁義培, 1795-1866)

 

성(聖) 마르꼬 정의배(丁義培, 1795-1866)


  한양 인근 마을인 창동의 양반 가정에서 1795년에 태어난 정 의배는, 양반 관례에 따라 입신 출세를 위해서 공맹(孔孟) 사상을 공부하면서 한문에 정통하였고 유교 관습에 깊이 젖어 있었다. 그는 과거 공부를 마친 후에 동네에서 서당을 차리고 소년들을 교육하였다. 정 의배는 처음에 천주교를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邪敎)로서 철저하게 배격하여 그의 형이 천주교에 입교하였을 때에 교리서를 빼앗아 소삭시키고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분을 숨긴 황 안드레아라는 친구와 세계관과 인생관을 토론하던 중에 유학에서 찾지 못한 해답을 듣게 되었다. 후에 정 의배는 그 친구가 천주교임을 알고 교리서를 구해서 읽고 영세하여 마르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그를 한양의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로 정 회장은 교우들을 지도하고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병자들을 방문하고 고아들에게는 자선을 베풀었다. 그는 조혼(早婚)한 아내와 사별한 후에 여교우와 재혼하였으나 새 아내와 정덕을 지키기로 합의, 실천하였고 아내의 조카 피 영록(바오로)을 양자로 삼았다. 1856년에 쁘르뜨니애르 신부가 입국하였을 때에 그는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시었고 피 바오로는 조선어를 가르쳤다.


  박해가 일어나자, 정 의배는 집안 식구를 피신시키고 그는 남아서 신부와 교우들을 돌보았다. 주교댁 하인 이 선이의 밀고로 1866년 2월 25일에 정 회장은 연금 상태에 있는 신부를 집에 남겨두고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그는 3월 1일에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고 이튿날 의금부로 이송되어 네 차례에 걸친 신문 중에서 16대의 매를 맞는 고문을 받았다. 정 마르꼬가 회장이라는 사실을 안 재판관은 교우들의 이름을 밝힐 것을 강요하였으나 이미 사망한 신자들의 이름만 댈 뿐이었다. 3월 6일에 그는 다시 포도청으로 송치되어 두 차례에 걸쳐 취조를 받으면서 계속 신앙을 고백하여 3월 11일에 쁘띠니꼴라 신부, 뿌르티에 신부, 우 세영과 함께 군문효수의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날에 함거(轞車)에 올라 조용히 기도하는 자세로 새남터 형장에 끌려가 두 성직자 다음으로 치명함으로 그의 평생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생존시에 “순교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며 자기 집에 누워 안일하게 죽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정 의배는 1968년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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