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출판, 교육

 

자선․출판․교육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에는 노인 복지 사업(양로원의 운영), 의료 사업(시약소의 설치) 이외에 고아 구제 사업이 활발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블랑 주교가 한양 곤당골(미동, 지금의 서울 을지로 1가)에 설립한 ‘천주교 고아원’을 인수하여 1888년 9월에 고아원을 종현(명동)으로 옮겼고 두 차례에 걸쳐(1889년과 1900년) 원사(院舍)를 개수 또는 신축하였다.


  남아들은 상점, 약국과 목고소, 철공소에서 기술을 익혔고 원내(院內)에서는 한글과 한문을 배우고 돗자리 짜기와 팔사(八絲) 치기 등의 실업 교육을 받았으며 여아들은 원내 학교에서 독서, 산술, 예법을 배우고 재봉, 수예, 세탁 등의 가사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고아 구제사업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본부와 파리의 성영회(聖嬰會)에서 보내는 보조금과 노동(세탁일)에서 얻어진 수익금으로 운영되었다. 이어서 수녀회는 1894년 제물포(인천 답동)에도 고아원(해성 보육원)을 세웠다.


  1886년에 꼬스뜨 부주교는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인쇄소를 한양으로 옮겨 교회의 인쇄 및 출판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근대식 방법에 의한 한글 활자 사용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로 교회는 교리서와 기도서는 물론 공문서, 순교사기, 신심서, 예절서 등 많은 교회 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저술하여 간행하였다. 이러한 출판 사업은 교회가 언론 활동에도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 10월 19일에 한글 주간지인 「경향신문」이 부록인 「보감」(寶鑑)과 함께 창간되었다. 「경향신문」은 정교 분리의 원칙 아래서 포교와 호교의 성격을 띤 종교 신문이었으며 교회의 공식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이 신문은 당시에 일반 신문의 애국 계몽의 경향과 같이 민중 계몽과 부국 강병의 추진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보감」은 ‘논설’ ‘법률 문답’ ‘대한성교사기’ ‘우연히 슈쟉’으로 구성되어 천주교의 교리와 역사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신자들과 외교인들의 법적 불이익을 방지 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한일 합방으로 1910년 12월 30일에 220호로 폐간되었고 「보감」은 제호를 「경향잡지」로 개명하여 종교잡지로서 「경향신문」을 이어 221호로 시작하였다. 이상과 같은 교회의 서적과 신문은 한글만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국어의 발달 및 보급과 한국 근대 문화에 추진력의 역할을 하였다.


  교회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 사업 이외에 출판 사업과 같이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일반 학교 사업을 전개하였다. 1900년에 이르러 국민의 교육열이 드높아지자 교회는 점차로 초등 교육 과정의 학교들을 개설하거나 기존의 학교 체제를 개편하였다. 1900년대에 신설되거나 개편된 학교들 중에서 대표적 교육 기관들은 ‘계성학교’(한양-종현, 1905년), ‘성의학교’(김천, 1907년), ‘동성학교(한양-백동, 1907년), ’안법학교‘(안성, 1908년), ’신성학교‘(제주도 1909년)등이었다.


  따라서 천주교는 신학문(新學問)과 근대 교육 방법을 도입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동시에 교회는 여성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수녀회가 운영하는 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계명여학교(한양-종현, 1905년), 성모여학교(평양, 1906년) 등이 있었다. 1910년에 이르러 교회는 124학교에서 3000여명의 학생을 교육하였다. 이러한 인문 교육 이외에 근로 청소년을 위한 야학교(夜學校)와 기술 학교를 세웠는데 특히 1909년에 입국한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백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혜화동) 일대를 매입하여 철공소, 목공소, 농장을 세워 이론과 실기를 통한 직업 교육을 실시하여 산업 기술 발전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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