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건립

 

성당 건립


  신교 자유 이후 시대의 교회 사업 중에 활발한 부분은 성당의 건립이었다.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의 제4항에 의하여 프랑스인들은 한양과 개항지에 한하여 대지와 가옥을 임대하거나 매입, 소유하고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본당을 신설하고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서 적당한 대지를 물색하였다. 이때에 대지는 교회의 과거 역사와 인연이 있는 장소가 선택되었는데 한양에서는 최초의 종교 집회가 개최된 첫 순교자 김 범우(토마스)의 집이 있던 명례방 상례원(상禮院) 옆 언덕(종현 대성당)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서소문 밖 근처의 대지(약현 성당)를 매입하였다. 이러한 대지 구입과 함께 성당 건축 사업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최근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이때에 건립된 성당은 건축 양식에 있어서 한옥 성당과 양옥 성당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옥 성당은 기존의 한옥을 개조하거나 한옥 형태의 신축 건물로서 전통적 목조 건축 양식에 속하였다. 당시에 이러한 한옥 목조 성당은 대부분 지방에서 세워진 건물로서 전라도 지방의 고산(되재) 성당(1889년), 경기도 지방의 갓등이(왕림) 옛 성당(1901년) 등이 있었다. 양옥 성당은 로마네스크(Romanesque), 고딕(Gothie) 양식, 고딕을 표방한 로마네스크 양식 등 3가지 형태의 건물로서 한양의 약현 성당(1891년)과 명동 성당(1898년), 경기도 지방의 제물포(인천 답동) 옛 성당(1899년), 경상도 지방의 대구(계산동) 성당(1902년) 등이 있었다. 여기서 약현 성당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최초의 양식 벽돌조 성당으로서 건축사상 의의있는 건물이며 이는 종현 성당과 함께 고스뜨 부주교의 설계와 감독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양옥 성당이 건축되면서 한옥 성당이 세어진 이유는 재정적 빈곤, 벽돌조 건축 기술자의 부족, 건축 자재의 미비 등에 있었다. 그러나 한옥 성당과 양옥 성당은 이후의 천주교 성당과 개신교의 예배당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 교회 건축사에 있어서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인 명동 대성당을 통해서 당시에 양식 벽돌조 성당 건축의 과정이 고찰될 수 있겠다. 이 성당은 수많은 난관과 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블랑 주교는 1883년경에 김 가밀로라는 교우의 명의로 종현 일부 지역을 구입하였다. 1885년에 뽀이스텔 경리 신부가 돌우물골(右井洞,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 부근)에 있던 경리부를 새문안으로 옮겼다가 1년 후에 다시 종현으로 이전하였다.


  이후로 몇 차례에 걸쳐 교회는 인근 대지를 사들여 1887년 말에 성당을 짓기 위한 정지 작업에 들어갔으나 1888년 1월에 정부가 국유지라는 이유와 풍수지리설을 들어 토지 소유권을 억류하는 바람에 대지 분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1년 만에 정부가 소유권을 교회에 반환하였다. 1892년 5월 8일에 대성당은 착공되어 재정난, 붕괴 사고, 청일 전쟁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단되거나 공사 감독이 교체되었다(1896년 2월 28일 꼬스뜨 신부가 서거하고 뽀아스넬 신부가 공사 업무를 인수함).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회는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건물의 축성과 종의 세례에 이어 장엄 미사로서 대망의 종현 대성당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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