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골 줄무덤 ..

 

다락골 줄무덤


        1842년 중국이 영국과의 이른바 “아편전쟁”에 대한 결산으로 2억 1천만량이라는 배상금을 물고 상해등 7개 항구를 내어주는 남경조약을 비롯하여 세계강국이 다투어 아세아 식민지 개척에 불을 뿜던 1800년대. 이 나라 통치자로 천하를 호령하던 작달막한 키의 대원군도 뜨거운 열강의 침략과 거센 개화의 물결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 왔던 천주교가 무참히 짓밟히고 충남 서산 가야산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다고 천주교도들이 떼 죽음을 당할 때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무덤이 청야군 화성면 농암리 멀리 서해바다가 보이는 오서산 깃슭의 다락골이라는 곳에 자라잡고 있다.


        이곳 다락골이라하면 생각나는 것이 김대건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마카오에 유학 신부가 됐던 최양업(도마)신부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 보다 나이가 늦어 함께 신부 수도를 하였으면서도 한국 신부사상 서열로는 두 번째가 된 최양업 신부가 태어났던 마을는 그 참화에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은 주춧돌과 그 때의 옹달샘과 연자방아만이 그대로 남아 잡초에 쌓여 있어 찾는 이의 마음을 한결 아프게 해준다.


        폐허가 되어버린 옛마을 터에서 북으로 약 10분 기슭으로 올라가면 거기16기의 묘가 네 줄로 남쪽을 향해 나란히 누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주교 순교자들의 무덤이며 줄지어 묻혀 있다하여 청양지방에서는 “줄묘”라 부른다. 천주교 순교자들의 무덤이 어디 이곳 뿐이겠는가만은 여기 “줄묘”와 불타버린 마을은 다른 순교자보다 더 짙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고 가장 강한 시대적 배경을 펼치고 있음을 현지에 가서 절감했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 그런데도 그 흔한 비석 하나 서 있지 않음은 누구를 탓하랴! 봉분마저 꺼져 가고 있는데다가 묘 높이 보다 더 크게 자란 갈대와 잡초만이 우거져 서해에서 불어노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도 여기 무덤에 피어난 향내 짙은 이름 모를 산꽃들! 어느 것은 하얀 산찔레 같고 어는 것은 흰 백합 같은데 그 풀 속엔 빨간 산딸기가 소담스럽게 열려 사람들은 이 서러운 무덤을 잊어버렸지만 신은 이를 황폐한 묘지를 이토록 이름다운 꽃을 피워 외롭운 넋들을 위로하는가.


        이 무덤이 자라잡은 것은 1866년 병인사옥이라는 대원군의 천주교들에 대한 대학살이 감행될 때였다. 이 해 기선 “차이나”호와 소기함 “그레타”호가 지금의 홍성 행담도에 출현하였는데 이 때 “그레타”호는 삽교천으로 와서 덕산의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이들 “그레타”호 선원들은 홍성군청을 습격하여 옥에 갇혀 있던 천주교도들을 풀어 놓고 바로 “가야산”으로 올라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이 워낙 단단하고 바다물이 나갈 시간이 임박해서 관을 부수지 못하고 그대로 동망쳤는데 대원군은 이것을 천주교들이 자기를 미워한 나머지 보복을한 것으로 알고, 또 마침내 南進을 꾀하는 러시아 세력을 프랑스 힘을 이용하여 저지코져 은밀히 프랑스 신부를 통해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존심만 상한터라 대원군은 이참 저참 박해의 꼬투리를 여기서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파헤친 것은 천주교도들이 아니고 당시 영국과 불란서 사이에 동양왕족의 무덤을 파헤쳐 그 속에서 나오는 보물을 탈취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는 것으로, 그 묘지발굴에 천주교신도가 한 둘 끼인 것은 사실이나 전적으로 이들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유력하다. 어쨋든 이 때문에 천주교도들의 대량 학살이 감행됐는데 대부분 서울의 “새문” 밖에서 칼로 목을 잘렸다.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지금의 절두산. 그런데 이렇게 대량학살이 진행중일때 궁중에서 國婚이 있어 궁중예법에의해 형장을 절두산에서 지금의 공주로 옮겼는데 그때 “로마”의 교황청에 보낸 밀서에 지금의 충남지성에서 순교를 한 전주교신자만도 공주 198명, 홍성 83명, 해미 39명, 기타지역 10명에서 320명에 이른다.


        물론 國婚때문에 천주교도 학살은 그후 서울에서 공주와 보령으로 옮겨져 시작되는데 보령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곳 화성면 다락골 교도들은 너무도 애통한 나머지 한밤에 보령 “갈매못” 형장에 잠입했다. 역적을 죽일 때처럼 무참히 죽어간 이들 시체들은 유족들이 찾아갈 수도 없었던지라 이들은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각오하고 형장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시체 16기를 메고 산줄기를 이용, 이곳 “오서산” 중턱에 옮겨와 되는대로 묻었다. 시체를 옮겨왔건만 모두 목이 잘린것이니 누구의 시체인지알길이 없었고 그래서 누구의 묘라는 碑하나 세우질 못하였다. 더우기 그 무덤이 천주교도의 무덤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큰화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마저 꽂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소행은 탈로가 났다. 천주교도들의 시체를 옮겨 묻은 것이 “다락골” 즉 우리나라 두번쨰 신부를 출생시킨 마을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는게 조정에 알려지자 그 마을을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있는게 그때 있던 옹달샘과 주춧돌, 그리고 임자없는 연자방아다. 이토록 거센 역사의 파도가 스쳐간 좁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룬 계곡에서서 불탄자리를 더듬으며 이름없는 순교자들의 무덤에 핀 꽃향기를 맡으면 그 순교자들을 위해 성모마리아를 찾고싶어진다.




1.최신부님 탄생마을(다락골)


        최양업 도마신부님의 탄생지는 충청도 홍주 다락골임이 틀림없다. 우선 최신부 이력서(최상종 저 p.185)에 보면 최신부의 묘지 비문에 “西歷 一八二一年 三月 一日 忠淸 洪州郡 褸谷誕生”이라 기록했고, 달레의 천주교회사를 보면(譯柱 本 p.17) 최씨 집안이 내포 다락골에 살았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그리고 경향잡지 1949년 4월호 p.54에 “최도마 신부 전기”가 실려있는데 최도마 신부의 탄생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즉 “최도마 신부의 태생지는 다래골이다.” 이는 “달레”신부의 저서 대한천주교회사에 기록된 바이오(달레二 160), 이미 작고하신 “삐숑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도서관으로부터 사본하여 가져온 대한천주교회사에 관한 문헌중 제1회 대한 신학생의 선서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선서문의 역문을 카톨릭청년지 제16호 9페이지에 발표된 그대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제1회 조선신학생의 선서문”. 一八三六年 十二月 二日 조선신학생이 수업한 신학교 교장 … 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노라.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목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허락하느뇨? 허락하옵니다.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조선 성직자들에게 장상의 허가없니는 그들이 지정하지 아니한 다른 지방이나 다른회로 가지않을것을 허락하느뇨? 허락하옵니다. 외방전교회신부 조선전교사 조선교회의 부득이 수석으로 있는 (이 아래 서명한) 나는 이 소년들 즉 최 방지거, 야고버와 황안나의 아들: 태생지 경기도 남인, 최도마: 태생지 충청도 밑내 솔뫼(二주:전문에는 놀매로 오식) 이들이 오주 예수고상 앞에서 복음성경위에 손을 대고 1836년 2월 2일에 서약을 받았음. 베드로 필리벨도 모방 조선 선교사.”


        위에 나온 것과 같이 최양업신부의 고향은 홍주 다래꼴이다. 다락골이 있는 오서산은 충남의 서해안에선 가장 높은 산이며 그 산 바로 아래에 있는 다락과 같은 마을이라 해서 다락골로 불리웠고, 다래가 많이 난다하여 다래꼴이라고도 불렸단다. 청양에서 대천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8Km가면 화성면 소재지가 나오며 화성우체국 옆으로 약 3.5Km산길로 들어가 위치해 있다.


 


2.다락골의 무명순교자 묘지


        다락골은 경주 최씨들이 약 400년간 살아온 촌이다. 지금 현재는 몇 집 남아있지 않으며 마을 뒷산(최씨 종산) 양지바른 곳에는 순교자들의 묘지가 있다. 현재 확인된 것은 14기인데 그밖에도 20여기가 봉분이 뚜렷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이것도 틀림없는 천주교 신자들의 묘지라 한다. 약 10년전에 대전교구에서는 이곳에 와서 순교자들의 묘지임을 확인하였으나 그 뒤로 돌보는 이 없어 나무가 우거진 것을 다시 정화하여 지난 82년 11월 23일 대전교구장 황민성주교님과 여러성직자, 청양 군내 기관장 그리고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천주교 무명 순교자들의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그 묘지에 대한 사적인 근거는 어디 있을까? 고로 새로운 증거자료가 나오길 원한다. 분명한 것은 구전도 확실성이 있다는 점이다. 천진암에 모신 여러 신앙 선조들의 유해도 거의 모두 구전에 의해 찾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구전은 무엇인가? 7대 방조후손 최충기씨(55세)에 의하면 박해시 홍주감영에서 순교한 최씨 일가를 야음을 틈타 업어다가 급히 묻었기 때문에 줄무덤을 지었다고 들었다 한다. 홍주(홍성)까지의 거리가 약 50리이고 보면 능히 그렇게 할 만하다. 어떤 이는 보령 갈매못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은 것이라 하나 한국교회사 연구소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님의 말에 의하면 보령 갈매못에서 죽은 치명자는 모두 명단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병인치명일기”(1895년 최 루수 신부 저)를 검토한 결과 “충청도 홍주”편에 보면 “608 최베드로”부터 12인의 최씨 일가의 순교 사실이 나오는데 교회사 유홍렬 박사는 이들을 줄무덤안의 주인공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608 최베드로를 보면 “홍주 원머리 사람이러니 무진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럼 원머리는 어디일까? 수소문했더니 홍성사는 어떤 교우가 택시운전을 10년 했는데 원머리는 홍성군 갈산면이라 한다. 그리고 최충기에 물으니 자기 문중 최씨일파가 홍성 구항목에도 살고 있다한다. 그렇다면 608 최베드로 일가는 홍성 구항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갈산면 바로 인접한 곳이 구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머리는 보령군 청라면에도 있다한다. 그러나 청라면은 화성면과 인접해 있지만 전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을엔(다락골) 아직도 구 집터들이 여럿 있는데 아마도 이곳은 옛날 최씨교우들이 살던 곳인 듯하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는 옛 연자방아들이 있는데 지금은 장대를 꽂아 동네 스피커를 매달았다. 한편 대전교구청에서는 나의 이런 노력의 결과로 줄무덤 근처를 매입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2.줄무덤(=무명순교자들의 묘)


가.생긴유래


        천주교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가니까 어린애가 울며 보채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 간단다”라고 달래어 데리고 가서 홍주(지금의 홍성)감영에서 치명당했으며 외인 친척들이 야음을 틈타 시신을 몰래 훔쳐 50여리길을 산길로 업어다가 이 마을 뒷산에 황급히 일가족씩 묻어줬다 한다. 이상은 이 마을 노인들의 구전내용이다. 오기선(요셉)신부님은 회고록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무덤에 대한 두가지 증언을 하고 있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사람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했던 최영천 노인등을 만나 직접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신부님 직접 이곳을 현지답사하여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또 하나는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손 아오스딩 노인께서 “쳥양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 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약 250여명의 교우가치명당하였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기에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라고 오신부님께서 직접 증언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곳 출무덤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에서 순교했던지,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구전상 장소의 차이는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천주교 순교자들이란 점이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외인 마을이 되어버린 다락골의 구전보다는 공주에 살던 교우노인들의 증언이 더 확실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줄무덤의 기수(무덤수)


        성역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필자는 마을의 구전 및 사료를 수집하고 현지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군데가 아니고 세군데임을 밝혀냈다. 편의상 제1, 2, 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고 오신부님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했으나 지금은 14기이다. 비신자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므로 종묘를 이장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3기가 파묘되었다. 제2무덤은 1무덤 바로 밑 우측으로 1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10기가 위치해 있다. 3무덤은 능선너머 다락골 마을쪽으로 1무덤에서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12기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줄무덤의 총수는 36기이다. 이들은 언제 치명당했을까? 병인박해때로 추정된다. 그리고 , 무덤안에는 일가족씩 묻혀 있다는 구전이므로 일가족을 3명씨감ㄴ 계산해도 무려 100여명이나 되는 전국 최다의 순교자 묘지인 것이다. 무덤의 봉분이 육안으로 보아도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무덤 봉분보다 유난히 더 크다.




다.순교자들이 살던 집터


        다락골 마을에는 옛날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가 약 10군데 정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들도 전에는 신자들의 집이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집터는 현재 덩굴이 우거져 있으며 어떤 곳은 밭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3.최경환 성인, 최양업 신부 탄생지


        다락골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새터(新垈)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최인주씨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 정착한 마을이며 결혼하여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 아들이 최경환 성인이시다. 최경환 성인은 이곳에 살면서 장남 최양업 신부를 낳은 후 수계생활이 어렵게 되자 주교, 신부 밑에서 신앙생활하려고 최양업 소년 12세때 서울로이사를 하게 된다. 지금도 이들이 마시던 우물이 있고 최양업 소년 어려서 뛰놀던 뒷동산과 천제바위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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