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 유해 안장된 미리내 , 이 원선시오

 

김대건 신부 유해 안장된 미리내


이 원선시오 밤길로 150리 운구


미리내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본방인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 순교하여 그의 시신이 열심한 교우 이민식(원선시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져 묻혀 있던 곳이다.


치명 후 한강 백사장에 가매장 되었던 김 신부의 유해를 찾으러 떠난 이 원선시오는 군졸들이 저녁 먹으러 간 틈을 타 시신을 발굴, 염을 한 다음 노들나루(노량진)를 무사히 건넜다.


그는 검은돌(흑석동), 과천을 지나오며 행인들의 이목을 생각하여 밤길만 걸었는데 그가 다래넝쿨 밑이나 화전 콩밭에 유해를 감추어 오면서 미리내에 도착하였을 때는 집 떠난지 3일 만이었다. 다시 자기집 헛간 보리짚에서 김 신부의 유해를 나흘 잠재운 이 원선시오는 1846년 10월 30일 자신의 종산으로 옮기면서 김 신부는 치명 45일만에 비로소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그때 당시,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의 시신은 사흘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연고자에게 찾아갈 수 있게 한 것이 상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마음대로 장례마저 치루지 못하도록 참수한 곳에 파수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후 1853년 김 신부에게 부제품을 준 페레올 고(高)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대로 김 신부님 옆자리에 묻히게 되었으며,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사별케 되어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눈물겨운 생애였던 김 신부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김대건 신부 곁에 고이 묻혀 애절했던 모자의 영혼을 달랬다.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미리내 공소에는 본당이 설립케 되였고 초대 신부로는 불랑 백 신부의 복사였으며 페낭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 1896년 4월 26일 우리 나라 처음으로 약현 성당에서 신부 서품을 받고 첫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 죽을 때까지 미리내에 있었던 강말구 신부였다. 그때 신자수는 무려 1,600여명에 달하였으며 1921년에는 이곳에 해성학교가 설립되어 국어, 산수, 역사, 농업, 교리 등을 가르쳤고 학생이 8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안팎으로 일찍 깨우친 산골임을 알 수 있다.


순교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혈혼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믿음의 짝이 죽순처럼 솟아올라 오늘날 대단위 성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순례자들을 이곳에서 엄숙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복음의 샘물로 가슴을 적시는 마음의 샘터이기도 하다.






김신부 시신 미리내에 안장한


이 민식 원선시오


평생 동정 지키며 교회사업에 헌신


함평 이씨 자손으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이 원선시오는 은이에서 전교하던 김신부가 30리 떨어진 이곳까지 올때면 길을 안내하는 등 영접준비를 도맡아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원선시오는 김 신부의 순교소식을 듣자 새남터로 백 오십리 길을 달려가 김 신부의 유해를 운반해와 무사히 미리내에 안장하였는데 당시 그는 열 일곱살로 건장하고 신덕 높은 청년이다.


그는 40세때 사제의 뜻을 이룰 결심으로 하고 페낭 신학교에 입학한 적이 있으나 중도에 그치고 돌아와서는 서울 약현 본당 초대 정신부의 복사를 지내며 교회사업에 주력하였다. 때문에 평생 동정을 지킨 그는 조카 이안당을 자식삼아 병목돌(현 용인군 이동면 묵리)에서 살다가 1921년 12월 9일 92세로 선종 하였다. 교회에서는 그의 생전에 공적을 평가하여 1976년 김 신부 묘소옆으로 그의 묘를 이장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메고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이 원선시오의 발자국


새남터 → 노들 → 동작동 → 남태령 → 과천 → 하우 고개 → 묘론이 고개 → 너덜이 → 분당리 → 태재 → 능골 → 참바대고개 → 삼막골 → 통점 → 두렁이 고개 → 은이 고개 → 해실이 고개 → 오두재 고개 → 검은정이 → 미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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