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교황 Petrus

 1. 베드로 교황 Petrus

  베드로라는 인물에 관하여 복음서들은 일치된 기록을 전해 주고 있다.


베드로는 원래 이름이 시몬이었고, 그의 형제 안드레아처럼,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다. 그는 가파르나움에서 살았고 결혼을 했었다(마태 1, 29 이하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이야기를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건과 관련해서는 서로 다른 보고들이 있다. 즉 요한 복음 1장 35절 이하에 따르면 먼저 야고보와 안드레아가 예수께 왔으며, 그들은 그들의 형제인 시몬과 요한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 예수께서는 벌써 이 최초의 만남에서 시몬의 이름을 게파(반석)로 바꾸셨다. 마르코 복음 1장 16절 이하에 의하면 이들 4명의 어부들은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중에 부름을 받았다. 예수께서 “나에게로 오너라. 그리고 내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렸고 예수를 따랐다.


  마태오 복음 4장 18절 이하에도 같은 대목이 보고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의 첫 번째 발현 이후에 4명의 어부들을 부르신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루가 복음 5장 1절 이하에서는 베드로의 소명을 고기를 많이 잡는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있다. 베드로가 ꡒ스승ꡓ이라고 불렀던 예수께서는 재차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라고 요구하셨고 고기를 많이 잡은 후 베드로는 예수의 발치에 엎드리면서 예수를 ꡒ주님ꡓ이라고 부르짖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대는 몸짓과 ‘주님’이라는 호칭은 베드로가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길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복음서들은 베드로가 다양한 기회에 사도들의 대변인으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고 난 다음(요한 6, 68),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당신을 누구로 여기는지를 물으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바로 이 기회에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ꡒ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생각지 않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구나ꡓ하는 심한 꾸지람을 예수로부터 들어야만 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께서 당신이 수난받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했을 때 그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다시 한 번 더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예수께서 수난 밤에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응하였다(마태 26, 33). 그러나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고는 대사제가 예수를 심문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마태 26, 69~75).


  요한 복음에 따르면 고기를 많이 잡고 난 뒤에 베드로에게 사목직이 위임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요한 21, 15~19). 또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는 유다 대신 마티아를 뽑을 때(사도 1, 15~26), 성령 강림 때의 설교(사도 2, 14~36)를 통해, 그리고 사도 공의회(사도 15, 7~11)를 통해 사도들의 대변자로 등장하였다. 베드로의 자세한 삶에 대해서는 교회의 역사학자인 에우세비오(†339년)가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베드로는 42년부터 67년까지 로마에 체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확실한 기록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49/50년경 예루살렘에서 사도 공의회가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44년에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 바오로 사도의 경우처럼 순회 사도로서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순회 사도는 대규모의 유다 공동체가 있는 도시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였으며 일정한 기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난 다음 순회 사도는 다른 지도자를 임명한 후 다른 곳으로 여행을 계속하였다.


  베드로는 아마도 안티오키아의 공동체 창설자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초기의 미사 전례서(missale)는 안티오키아에서 2월 22일을 성 베드로좌 축일로 기념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순회 사도는 이미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 또는 공동체 질서가 존재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창설자로 인정받았다. 순회 사도들은 자신의 권한으로 교사이면서 동시에 전권을 위임받아 공동체를 직무상으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임명하였다. 이 두 직무는 공동체로부터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설한 사도로부터 위임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가장 오래된 공동체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들의 공동체 창설자로 여겨진다. 베드로는 이미 로마에 싹을 틔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정착시켰고 지도자를 임명하였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베드로가 로마에 왔던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증언이 있다.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 1세는 고린토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와 함께 있었던’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즉 네로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또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도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사도가 로마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저술가들도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린토의 디오니시오와 리옹의 이레네오도 베드로에 의해 로마 공동체가 설립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또 다른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로마는 두 사도가 순교한 도시로서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로마 이외에 다른 곳에서 결코 순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로마에서의 베드로의 죽음은 보다 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 치하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64~67년)에 로마에 갔고, 전승에 의하면 머리가 땅으로 향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은 교황 비오 1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리고 후에 지시한 성 베드로 성당의 지하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는, 베드로의 무덤은 확실히 그리스도인들이 1900년 전부터 사도를 공경하던 바로 그 위치에 있다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교회는 성 바오로․성 베드로의 축일을 6월 29일에 기념하고,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2월 22일에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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