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9세 교황 Leo 9.

 170. 레오 9세 교황 Leo Ⅸ.  1049~1054

레오 9세의 원래 이름은 브루노(Bruno)였다. 그는 에기스하임-다크스부르크(Egisheim-Dagsburg)의 백작이었고, 아울러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사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레오 9세는 툴(Toul)의 주교였다. 툴 교구에서 레오 9세는 수많은 수도원을 클뤼니 정신에 따라 개혁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의 교황 선출은 1048년 보름스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에서 논의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선거가 적법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교황직을 수락하였다. 1049년 2월 12일 레오 9세는 라테라노에서 교황 착좌식을 가졌다.


  레오 9세 교황은 클뤼니 정신에 따라 개혁을 추진하였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교황 레오 9세는 여러 조언자 가운데, 특히 나중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선출된 힐데브란트(Hildebrand)와 스테파노 9세로 선출된 리에주(Luttich)의 대부제였던 프리드리히(Friedrich von Lothringen)의 조언을 즐겨 들었다. 교황 레오 9세는 교회의 개혁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행을 많이 다녔다. 교황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개최된 시노드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9세가 추진하였던 개혁은 교황권의 강화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 레오 9세는 저명한 인물들로 구성된 추기경단을 교황을 위한 조언 그룹으로 변화시키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9세는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교황들이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독일의 황제들에게 예속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식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취한 교황 레오 9세의 일련의 정치적 조치들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노르만족들이 여전히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만족의 침략을 종식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던 교황의 군대가 1053년 아풀리아(Apulien)에서 참패하였다. 그 결과 교황 자신도 9개월 동안 베네벤토(Benevent)에서 포로 생활을 하였다.


  교황 레오 9세는 동방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043년 이래 미카엘(Michael Kerrularios)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초대 주교로 재임하고 있었다. 미카엘 총대주교는 서방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미카엘 총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서방 교회의 신앙을 공격하였다. 교황 레오 9세의 비서였던 훔베르트(Humbert) 추기경은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면서 동방 교회의 관습에 역공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파문의 처벌로 위협을 가하였다. 1054년 초,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특사가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특사는 1054년 7월 16일 소피아 성당에서 훔베르트 추기경이 작성한 파문 칙서를 백성들과 성직자들 앞에서 낭독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그사이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4월 19일에 서거하였다. 독일의 황제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를 중재하려고 모색하였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미카엘은 서방 교회에 대해 파문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온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교황 레오 9세는 서거 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서거일인 4월 19일은 동시에 그의 전례 기념일이기도 하다. 교황 레오 9세는 중세기의 독일 출신 교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교황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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