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오 4세 교황 Nikolaus 4.

 223. 니콜라오 4세 교황  Nikolaus Ⅳ.  1288~1292

1287년 교황 호노리오 4세 서거 후 교황좌를 둘러싼 갈등은 거의 1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단일 후보자의 옹립에 실패를 거듭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몇몇 추기경들은 사망하거나 아니면 질병에 걸려 봉쇄 교황 선거는 해산되었다. 1288년 2월 22일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지롤라모(Girolamo Masei von Dalmatien)가 니콜라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속하는 수도승이었고, 이 수도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좌에 등극하였다. 1272년 그는 달마티아(Dalmatien)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고, 후에는 비잔틴 제국의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다. 1274년 프란치스코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278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으며, 1281년 이래 팔레스트리나의 교구장으로 재직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중용을 지키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로마 귀족 가문들 사이의 갈등으로 로마에는 소요가 발생하였고, 이 소요는 교황 니콜라오 4세로 하여금 로마를 떠나야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재임 중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탈취당하였다. 1289년 술탄에 의해 트리폴리스(Tripolis)가 점령당하였고, 1291년에는 아콘이 함락되었다. 십자군 출정을 촉구하는 교황의 호소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 결과 성지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선교 교황으로 칭송을 받았다.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위임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알바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 선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프란치스코회에 속하는 어떤 수도승은 교황의 서한을 지참하고 중국에까지 파견되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 수도승을 중국의 수도 북경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아울러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예술 애호가이기도 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92년 4월 4일 서거하였고, 자신이 벽감을 모자이크로 새롭게 단장하게 한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안장되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ictionary3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